[겸재정선이 본 한양진경]<32>시화환상간

  • 입력 2002년 11월 15일 18시 12분


겸재가 양천 현령으로 부임한 것은 영조 16년(1740) 초가을이다. 이 때 겸재는 동심지우(同心之友)인 사천 이병연과 석별의 정을 나누며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 즉, ‘시와 그림을 서로 바꿔보자’는 약속을 굳게 하고 떠났던 모양이다.

그래서 겸재는 부임하자 마자 양수리 일대로부터 양천현 일대에 이르는 한강 주변의 명승지들을 화폭에 담아 부지런히 사천에게 보냈고, 사천도 이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보냈던 것이다.

어느 때는 그림이 먼저고, 어느 때는 시가 먼저였던 모양이다. 이 그림은 시가 먼저 가서 그려진 듯하다. 그림 바로 다음 장에 이런 시찰(詩札·시로 쓰여진 편지)이 붙어있기 때문이다.

‘겸재와 더불어 시가 가면 그림이 온다는 약속이 있어서 기약대로 가고 옴을 시작한다. 내 시, 자네 그림 서로 바꿈에 경중(輕重)을 어찌 값으로 따져 말하겠는가. 시는 간과 장에서 나오고 그림은 손으로 휘두르니, 누가 쉽고 누가 어려운 지 모르겠구나. 신유(辛酉) 한 봄에 사천 아우가.’ 이 시찰을 받고 겸재는 시화환상간의 약속을 하던 그 날의 정경을 떠올리며 그대로 그 장면을 그린 듯하다.

겸재는 사천과 단 둘이 지금 청와대 서쪽 별관 근처의 북악산 기슭 개울가의 어느 노송(老松) 밑에 앉아 시전(詩箋·시 쓰는 종이)과 화전(畵箋·그림 그리는 종이)을 펼쳐놓고 시화를 논하며 시화환상간의 약속을 했던 것이다.

아직 늦더위가 극성을 부리고 아침저녁으로 선들바람이 부는 그런 철이라서 베옷을 채 벗지 못한 듯하니 소나무에서는 매미의 구성진 울음소리가 물소리를 제압할 만큼 크게 울려 퍼질 듯하다.

이런 호젓한 분위기 속에 평생 뜻을 같이 하며 진경시와 진경산수화의 양대 거장으로 시화쌍벽(詩畵雙璧)의 칭호를 얻은 두 노우(老友)가 마주 앉아 잠시의 이별도 섭섭해 시와 그림을 서로 바꿔보자고 굳게 약속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얼마나 부러운 장면인가. 진경시대를 살아가던 선비들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인물 묘사는 간결하고 질박하며 부드러운 묘선을 구사했으나 골기(骨氣)가 내재해 생동감은 물론이거니와 그 정신까지도 감지되는 듯하다. 겸재의 평생 그림 수련 결과가 이 곳에 총 집결된 느낌이 든다.

정면으로 얼굴을 보이고 앉은 노인이 사천일 것이고 그와 마주 앉아 뒷모습과 옆모습만 보이는 콧대높은 노인이 겸재일 것이다. 다른 그림에서 보이는 겸재의 모습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둘 다 갓을 벗은 맨 상투 차림이다. 격의 없이 사귀던 평생지기의 돈독한 정의(情誼)를 이 그림에서 실감할 수 있다. 영조 30년(1754) 비단에 엷게 채색한 26.4×29.0㎝ 크기의 그림으로 간송미술관 소장품.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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