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정선이 본 한양진경]<33>인곡정사

  • 입력 2002년 11월 29일 17시 35분


조선 영조 22년(1746) 겸재가 71세 때 살던 자택의 모습이다. 현재 종로구 옥인동 20에 해당하는 곳. 당시 이곳의 지명이 한도 북부 순화방 창의리 인왕곡(仁王谷)이었기 때문에 인곡정사(仁谷精舍)라는 택호(宅號)를 썼던 모양이다.

이 그림을 그린 내력은 그림이 들어있는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의 발문(跋文·책의 후기)에 밝혀져 있다. 겸재의 둘째 아들인 정만수(鄭萬遂)가 지은 이 발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주자서절요서(朱子書節要序)’를 직접 짓고 썼다. 이는 퇴계의 자손을 거치고 거쳐 후에 겸재의 외조부인 박자진(朴自振)에게 전해졌다. 박자진은 스승인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에게 이를 두 번이나 보여주고 발문을 받아왔다.

겸재의 아들 정만수는 박자진의 증손자 박종상(朴宗祥)을 졸라 우암의 발문이 딸린 퇴계의 친필 주자서절요서를 집으로 가져온다.

이에 겸재가 크게 기뻐해 퇴계가 주자서절요서를 짓던 곳과 박자진이 우암의 발문을 받던 장면을 각각 ‘계상정거(溪上靜居)’와 ‘무봉산중(舞鳳山中)’이란 이름으로 그려낸다.

그리고 청풍계에 있던 자신의 외가를 그린 ‘풍계유택(楓溪遺宅)’과 주자서절요서를 수장할 자신의 집을 그린 ‘인곡정사’ 등을 모두 한 책으로 묶어 ‘퇴우이선생진적첩’을 만들었다.

그림을 보면 행랑채가 딸린 솟을대문 안에 ‘ㄷ’자 모양의 본채를 가진 단출한 구조의 남향집이다. 안채로 바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사랑채부터 담을 두르고 중문(中門)을 냈다. 이것이 사대부 집의 기본 구조다. 중문 안에는 헛간채 장독대 등이 구비돼 있다.

안목 있는 선비가 살기에 적당한 규모의 조촐한 집이다. 뒤울 안에는 대나무가 우거지고 담장 밖 뒷동산에는 노송이 숲을 이뤘다. 사랑채 앞마당에는 잡수 몇 그루가 제멋대로 자라서 그늘을 드리우고 행랑채 곁에도 고목나무가 서있다.

나무 그늘 아래에는 네모진 좌대석이 놓여있고, 지붕을 씌운 김치막 곁에는 바위더미가 자연스럽게 쌓여있다. 정녕 화성(畵聖)다운 감각으로 운치 있게 꾸민 생활공간이다.

본채는 30여칸, 행랑채는 6칸쯤 돼 보인다. 이 집 곁에서 살았던 조영석(趙榮_)이 16칸 집을 은화 150냥에 샀다 했으니 아마 이 집은 300냥쯤은 나갔을 듯하다.

겸재가 어느 부자에게 ‘소문첩(昭文帖)’이라는 화첩을 그려주고 150냥을 받은 적도 있었다 하니 이만한 집을 장만해 살기는 어렵지 않았을 듯하다. 영조 22년, 종이에 그린 22×32.3㎝ 크기의 수묵화로 보물 585호로 지정돼 있다.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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