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장갑차 여중생 치사사건을 계기로 국내에서 반미(反美) 분위기가 확산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 쪽에서도 대한(對韓) 기류가 심상치 않게 바뀔 조짐이 나타나고 있어 청와대 등 정부 핵심에서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정부가 보는 미국 쪽 기류〓한국의 시위 사태와 관련해, 미국 조야에서는 “한국의 시위사태를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 정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이 같은 반응의 논거는 △이미 사망 여중생에 대해 사과와 보상을 약속했고 △미국 사법제도상 공무 수행 중 과실사고는 처벌하지 않도록 돼 있으며 △해외 주둔군의 공무수행 중 사건사고는 재판권을 본국이 행사하는 게 국제적 관례라는 점이다.
실제 미국 내 일각에서는 “한국인을 위해 피를 흘린 주한미군에 대해 이럴 수 있느냐”며 “그렇게 한국 사람들이 원한다면 미군 철수를 검토해야 한다”는 강경론까지 나오고 있다는 것.
물론 주한미군 철수 등의 극단적 주장은 아직은 개인적이고, 감정적 수준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상황이 계속 악화되면 그런 논의가 공론화될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만은 없다는 게 우리 정부 관계자들의 솔직한 우려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6일 일선 공무원 격려 오찬에서 필리핀의 미군 철수 과정을 예로 들어 미군 철수론에 강한 우려를 나타낸 것도 미국 쪽 기류를 의식한 것이라는 게 청와대 관계자의 설명이다. 김 대통령은 “여중생 문제가 비약돼 ‘반미’다, ‘미군철수’다 하는 것은 안 된다”며 “필리핀은 수비크만 해군기지 등에서 미군 나가라고 외쳤다. 일부에서는 설마 미군이 나갈까 했지만 나갔다. 이로 인해 필리핀은 경제 국방상으로 큰 문제가 있었다”고 말했다. 미국이 철수문제를 공개 거론하는 순간 외국자본이 대거 빠져나가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미군철수 문제를 ‘설마’ 하는 생각에서 감정적으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다.
▽“국내여론도 의식해야…”〓한미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국내의 반미분위기를 진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지만 뾰족한 방안이 없다는 것이 정부의 고민이다. 사고를 낸 미군 처벌 등 시위 주최측이 요구하는 사안은 대부분 한미간 사법제도 및 문화 차이 등과 관련된 것으로 즉각 해결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김 대통령이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은 일본 독일과 비슷하고, 절대 못할 것이 없다”고 언급한 것도 SOFA의 재개정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정부는 이에 따라 한미간 실무협의를 통해 SOFA의 운용개선과 사고재발 방지대책 등을 강구하고 있으나, 시위 주최측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는 거리가 있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현실적인 해법을 제시하고 대국민 설득에 나서는 등 적극적인 해결 노력을 하기보다는 최근의 시위 사태를 방치하는 듯한 경향도 없지 않다는 비판도 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9일 “광화문 촛불 시위는 전체적으로 다수 대중이 평화적으로 했고 추모와 재발방지에 많은 마음을 두고 있었다”며 “시민의식이 성숙했다”고 강조했다. 청와대 측은 그러나 반미를 내용으로 하는 만화가 인터넷을 통해 급속히 확산되고 있고, 농성장에서 ‘양키 고 홈’ 소리가 나오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윤승모기자 ysm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