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반짝경기는 고사하고 연말 대목조차 사라져 버렸습니다.”
주말 오후 서울 용산전자상가와 동대문 의류상가는 “손님보다 종업원들이 더 많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스산한 모습이었다. 상인들은 “외환위기를 극복했다는 데 경기는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며 손을 내저었다.
연말이 다가올수록 서민들의 체감경기가 급속히 얼어붙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발표한 거시 경제지표는 안정된 듯 보이지만 소비와 고용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체감경기는 이와는 달리 ‘혹한의 영하권’에 빠져들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서민경제의 현장〓일요일인 15일 낮 서울 중구 무교동 J식당. 토요일 손님이 급격히 줄면서 전날 들여놓은 물수건 160개 중 120여개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식당 물수건 공급업체인 서울위생 장진균 소장(49)은 “작년에 비해 물수건 사용량이 3분의 1 정도 줄었다”며 “오늘 방문한 40여개의 가게 중 10여 군데는 물수건을 아예 추가주문하지도 않았다”고 전했다.
직장인들의 점심식사 모습도 외환위기 때와 흡사하다. 한 그릇에 4500원짜리 북엇국, 된장찌개를 파는 서울 중구의 식당들은 거의 매일 점심시간이 끝나가는 오후 1시 직전까지도 10∼20명이 줄을 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반면 1인당 1만5000원선인 복국집의 경우 예약을 안 해도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을 정도. C복집 사장은 “복국을 먹는 손님들은 다소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이라며 “그런데도 손님이 30% 이상 줄어든 것을 보면 유흥업소의 술손님이 크게 줄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심야 술손님을 상대로 한 택시의 이른바 ‘따블’요금도 사라지고 있다. 서울 도심에서 경기 성남시 분당이나 고양시 일산 등 신도시를 갈 때도 ‘추가요금’ 없이 미터기 요금만 받는 경우가 늘고 있다.
택시운전사 전택수씨(64)는 “올 여름에는 음식점과 술집이 몰려있는 서울 강남에서 택시를 잡으려는 승객들이 차도까지 점령했다”며 “지금은 승객보다 오히려 택시가 많다”고 말했다.
서울 I택시 회사는 경영난으로 택시 95대 중 12대가량이 ‘쉬고’있으며 사납금을 못 채우는 운전사가 갈수록 늘고 있다고 밝혔다.
유행을 타는 휴대전화 가게들은 더 큰 타격을 입고 있다. 서울 용산전자상가에서 휴대전화 가게를 운영하는 윤희원씨(33)는 “작년 이맘때 하루 15∼20대를 팔았으나 지금은 겨우 3대 정도”라고 말했다.
주말 저녁 서울 동대문 두산타워. 토요일인 데도 매장 안은 적막감이 돌았다. 여성정장 가게주인 박선남씨(26·여)는 “작년에는 금요일 저녁이면 20여벌 정도를 팔았는데 오늘은 두 벌밖에 못 팔았다”고 푸념했다.
▽원인 및 전망〓전문가들은 한국 경제가 ‘외환’ 문제는 해결했지만 근본적인 체질 개선을 이루지는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금융과 우량기업에까지 외국 자본이 대거 진출하면서 고용에 대한 불안심리가 더 확산되고 있다는 것.
푸르덴셜생명보험 강신우 전무는 “금융기관들이 개인대출을 까다롭게 적용할 경우 내년 상반기에 개인파산이 대량으로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이 때문에 ‘체감경기’지표는 외환위기 이상으로 악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경제연구소 박동철(朴東哲) 거시경제실장은 “기업들이 불투명한 경기 때문에 투자와 고용을 줄임으로써 실업률이 높아지고 소비가 움츠러드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