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사회]<2>‘No老 인생’ 사는 사람들

  • 입력 2003년 1월 9일 18시 17분


‘인생은 지금부터.’ 결혼식문화연구원 회원들이 서울 중구 노인회 사무실에서 기획안을 검토하며 활기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전종환 유한권 김동은 임완철 은희권 이준용 고성욱씨(왼쪽부터). -전영한기자
‘인생은 지금부터.’ 결혼식문화연구원 회원들이 서울 중구 노인회 사무실에서 기획안을 검토하며 활기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전종환 유한권 김동은 임완철 은희권 이준용 고성욱씨(왼쪽부터). -전영한기자
“세상에 이럴 수 있나, 나 혼자만 낙오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할 일 없이 이 산 저 산 돌아다니는데 자존심이 더 상하고 허탈감이라 할까, 소외감이 막 몰려오더라고.”

전종환(全鍾煥·서울 마포구 서교동)씨는 1999년 말 퇴직한 직후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주민등록상 1940년생으로 올해 63세지만 실제로는 1938년에 태어난 서울 토박이다.

61년 군 생활을 시작해 베트남전에 맹호부대 기갑연대 2중대장으로 약 1년간 참전한 경력이 있다. 83년 중령으로 예편한 뒤 국방부 기무학교에 특채돼 북한관계를 다루는 안보학 처장으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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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후반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는 이혜자씨가 볼링장에서 젊은이 못지않은 멋진 자세로 볼을 굴리고 있다. -원대연기자

등산을 다닌 것은 퇴직한 뒤부터다. 아무데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가끔 군 후배들을 찾아갔지만 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38년간 단체생활을 하다 갑자기 혼자 지내려니 여간 힘들지 않았다.

관악산, 도봉산, 청계산을 찾는 날이 늘었다. 산에서 텐트를 치고 이틀 내리 잠을 자고 하루 종일 굶은 채 누워 있기도 했다. 그는 “당시에 너무 괴로워서 자살할 생각까지 해 봤다”고 말했다.

퇴직 후 첫 1년을 이렇게 보낸 전씨는 유서를 쓴다는 기분으로 베트남 참전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A4용지 3장 분량으로 인터넷에 올리자 일부 네티즌이 “영화나 소설 속 장면과 너무 다르다”고 지적했다.

그는 “영화와 소설이 오히려 잘못됐다”고 e메일을 보낸 뒤 참전기를 계속 썼다. 그러자 베트남전 전우, 군 관계자를 비롯해 많은 사람의 격려가 이어졌다.

유서로 생각하고 시작한 글이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그는 생기를 되찾았다. 신문이나 인터넷에 나온 강의와 강좌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그는 기무학교 근무 시절인 89년에 전산자격증을 취득했다. 이 경험을 살려 서울 시내 몇몇 노인회가 주관하는 컴퓨터 교육의 강사가 돼 같은 또래 노인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쳤다.

“일을 만들고 거기에 몰입하니까 인생이 즐겁고 생활이 나태해지지 않았다”고 그는 말했다.

지난해 5월부터는 ‘한국 전례원’을 찾아가 한국의 전통예절을 배웠다. 스팸 메일을 꼼꼼히 읽다가 청소년에게 좋지 않은 내용을 발견하면 바로 항의한다.

이런 식으로 일을 만들다 보니 퇴직 전보다 더 바쁘게 하루를 보낸다. 베트남 인터넷전우회 초대회장, 영관장교 연합회 운영위원, 한국 전례원 명예교수, 한국주례전문인협회 부회장, 21세기 결혼식문화 연구학회장 등이 그가 가진 직함이다.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라 처음 본 것, 궁금한 내용은 반드시 알아야 직성이 풀린다. 거의 매일 오전 2∼3시까지 컴퓨터 앞에 앉는 것도 이 때문. 그러나 어김없이 오전 7시반∼8시반경에 일어나고 1주일에 2, 3차례 테니스를 즐길 정도의 체력을 유지한다.

그러나 모든 노인이 전씨처럼 노후를 활기차게 보내는 것은 아니다. 한국노인문제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72.5%의 노인이 집에서 TV를 보거나 라디오를 들으며 하루를 지낸다.

공원 복덕방 경로당에서 시간을 때우는 노인이 17.4%. 운동을 즐기는 경우는 6.9%에 그치고 예술 관련 활동에 관심있는 비율은 1%에 불과하다. 서구의 노인이 운동 여행 공연 자원봉사 등 다양한 활동을 즐기는 것과 대조적이다.

지난해 10월 대한노인병학회가 주최한 건강노인선발대회에서 여자부문 최우수상을 받은 이혜자(李蕙子·78·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씨 역시 대부분의 노인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활동 없이 노후를 보낸다. 그러나 ‘건강이 만사’라며 건강을 유지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다르다.

오전 6시경 일어나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몸을 푼 뒤 여의도 시민공원에 나가서 5000보(약 4㎞)를 걷는다. 1980년부터 지금까지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는 일이다.

“내 몸을 스스로 관리하자는 생각에서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1만보를 걸었는데 조금 숨이 차는 것 같아 운동량을 줄였죠.”

30년간 즐긴 볼링은 평균 점수가 150∼180점. 가볍게 허리를 굽혀 두 손바닥을 바닥에 댈 정도로 몸이 유연하다. 기억력을 유지하려고 각국의 지명이나 기념일 숫자 등을 계속해서 외운다고 한다.

건강노인선발대회에서 그녀는 기억력과 계산력을 알아보는 인지기능검사(25점 만점에 22.5점), 체력검사(25점 만점에 19.5점), 체지방 및 복부 비만도검사(10점 만점에 10점)에서 골고루 높은 점수를 받았다.

심사위원이었던 경희대 의대 원장원(元章源) 교수는 “이씨는 70대 후반의 나이인데도 60대 초반의 건강 상태를 유지한 것으로 평가됐다”고 말했다.

이씨는 43년 신의주 남공립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조선은행에서 3년간 근무했다. 지금도 일본어를 잘해 자원봉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몸이 불편한 큰아들(49)을 돌보고 화초를 키우는 것으로 대신한다.

신문의 모든 내용을 빼놓지 않고 읽고 방송의 교양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 것이 취미다. 좋은 교양프로그램을 시청률 때문에 밤늦게 방영해서 자주 못 보는 것이 불만이다.

“누가 노인에게 일감을 주나. 스스로 일을 찾아야 한다고. 정 안되면 집 앞 눈이나 쓰레기라도 치워야지.”(전씨)

“운동을 꾸준히 하면서 마음을 비우고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이씨)

두 사람은 ‘제2의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송상근기자 songmoon@donga.com


▼전문가 기고▼

미국 시애틀 근교 노인전용 아파트에 사는 모리스씨(69)는 동네를 한바퀴 도는 산책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보잉사의 기술자로 일하다 은퇴한 그는 3년 전 부인과 사별하자 살던 집을 처분하고 이곳으로 이사했다.

아침식사 후 그는 셔틀버스를 타고 그린우드에 있는 노인복지센터로 간다. 이곳에서 오전에는 도미노게임 운동 연극 집단토론 컴퓨터 도자기 정원가꾸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점심식사를 한다.

오후에는 미국은퇴자협회(AARP)의 인터넷 홈페이지(www.aarp.org)에 들어가서 필요한 정보를 검색하며 1주일에 두 번 정도는 센터 소식지를 만드는 일에 참여한다.

같은 아파트의 70대 하트씨 부부는 ‘가족의 친구들(Family Friends)’이라는 자원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연방정부 노인복지청의 지원으로 1990년에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노인자원봉사자가 장애 또는 만성질환을 가진 아동의 양육을 돕는 활동이다.

하트씨 부부는 뇌성마비 장애아인 루시(10)의 친구가 되어 글읽기를 가르친다. 세 번이나 입양되었던 루시는 이들을 만난 뒤 대인 공포증에서 벗어나고 학습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그린우드 센터는 1967년 설립된 비영리 기관인 시애틀 시니어서비스(Senior Service)가 운영하는 9개의 노인복지센터 가운데 하나이다. 노인을 위한 도시락 배달, 집수리, 상담, 건강진단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며 혼자 사는 노인의 집안 일을 돕고 말벗이 되어 주며 저렴한 월셋방을 이용할 사람을 연결해주기도 한다.

직원 250명, 자원봉사자 6300명이 시니어서비스 운영에 참여하는데 연간 130억원가량의 운영비는 연방정부 주정부 시정부의 예산과 개인 기업 재단의 기부금으로 마련한다.

미국의 엘더호스텔(Elderhostel)이라는 단체는 55세 이상의 노인이 저렴한 비용으로 여행을 하도록 돕는다. 100여개국을 대상으로 1만개가량의 프로그램이 마련돼 연간 25만명이 참여한다.

영국에서 문학 공부하기, 그랜드캐니언에서 자전거 타기, 멸종위기의 동물보호를 위한 탐험, 호두까기 인형 만들기, 손자 손녀와 기구타기…. 흥미로운 주제의 학습여행을 통해 동년배와의 만남과 평생교육 기회를 주고 있다.

요즘 미국에서는 50세 이상 고령자를 위한 ‘활동적인 생애만들기’(Active for LifeTM) 캠페인이 한창이다. 하루 30분 이상, 주 5회 이상 규칙적으로 운동하자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또 자원봉사를 장려하고 노후를 활기차게 보내도록 하기 위한 ‘고령자 지역사회서비스 고용 프로그램(Senior Community Service Employment Programme)’에 역점을 두고 있다. 이는 저소득 고령자가 음식배달, 방과 후 교실 프로그램 운영, 도서관 보조원, 교사보조, 간병인 등으로 주당 20시간씩 활동하고 최저임금을 받도록 하는 제도이다.

박영란 (한국여성개발원 연구위원·사회복지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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