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가 자욱해 이미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어요. 간신히 벽을 더듬으며 계단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방향을 잘못 잡아 벽이 막다른 곳에서 끝났어요.”
그 순간 황씨는 “이제 죽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어둠 속에서는 사람들의 비명과 넘어지는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황씨는 침착하게 지나온 벽을 더듬으며 다시 반대편으로 움직였다. 유독 가스를 많이 마셔 가슴이 따갑고 답답해 오면서 정신도 혼미해졌지만 그때마다 남편과 세 딸의 얼굴을 떠올리며 정신을 차렸다.
황씨는 “겨우 계단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찾아 더듬으며 움직일 때의 몇 분은 마치 억겁의 시간과 같았다”며 “계단을 올라와 개찰구쯤에 이르렀을 때 소방대원을 만났고 그들의 부축을 받아 밖으로 나와 맑은 공기를 마셨을 때 ‘이제야 살았다’는 실감이 났다”고 말했다. 황씨의 경우는 최초 도피가 빨랐던 데다 당황하지 않아 위기를 모면한 경우.
불이 난 차량 반대편에서 진입하던 1080호 전동차에 타고 있던 정정호씨(51·동구 신천동 가람타운)는 사고 발생 초기 빠른 상황 판단 때문에 무사히 대피할 수 있었다.
안내방송에서 ‘조금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곧 있으면 출발합니다’는 멘트가 나왔다. 조금 불안했지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전철 형광등이 깜빡깜빡하고 그때 5, 6호 객차 사이 연결통로에서 불이 붙어 연기가 물밀듯이 들이닥쳤다.
다른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여기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유리창을 발로 3, 4번 찼다. 유리창이 조금 깨져서 그 사이로 어깨를 먼저 집어넣고 겨우 탈출했다. 다른 승객 한 명이 깨진 유리창 사이로 탈출하는 것을 보고 껌껌한 공간 속에서 계단을 찾아 더듬더듬 통로를 찾았다.
정씨는 “지하 1층에 도착하니 불빛이 보였으며 소방관들에게 구조됐다”며 “아마 그 유리창을 깨고 탈출하지 못했다면 죽었을 것”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초기 대피는 늦었지만 침착한 대응으로 위기를 모면한 경우도 있었다.
같은 1080호 전동차에 타고 있던 황순공씨(22·경북 칠곡군 왜관읍)는 전동차 출입문이 닫혀 꼼짝없이 5분여가량을 객차에 갇혀 있었다. 연기가 객차 안으로 스며들어 숨쉬기는 힘들었고,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따가웠다.
누군가가 문을 열자 사람들이 우르르 나오면서 우왕좌왕했고 한 치 앞을 볼 수 없었다. 사람들에게 밀려 방향을 잡지 못하던 중 어둠 속으로 희미하게 광고판이 보였다. 벽에 붙어 있는 광고판을 따라 가면 출구가 나올 수 있을 것 같아 한 쪽 방향으로만 달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119 대원의 불빛이 보였다. 생명의 빛이었다.
대구〓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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