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의사 모녀 살인사건, 과연 진범은 어디에…

  • 입력 2003년 2월 26일 18시 56분


무죄가 확정된 치과의사 모녀살인사건 피고인 이도행씨. -연합
무죄가 확정된 치과의사 모녀살인사건 피고인 이도행씨. -연합
《‘한국판 O J 심슨 사건’으로 불리면서 1, 2, 3심을 오가며 유무죄로 판결 주문이 오락가락 엇갈렸던 ‘치과의사 모녀 살인’ 사건 피고인 이도행(李都行)씨가 8년만에 무죄로 풀려났다. 대법원 1부(주심 서성·徐晟 대법관)는 26일 치과의사인 아내 최모씨(사망 당시 31세)와 딸을 목졸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외과의사 이씨에 대한 재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가장 중요한 간접증거인 최씨의 사망 시각에 관한 증명력이 새로 조사된 스위스 법의학자의 증언이나 화재 실험 결과에서 크게 줄어들었으며 제출된 증거만으로는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없이 이씨에 대해 유죄로 판단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씨는 95년 6월 서울 불광동 아파트에서 아내와 딸을 살해하고 시체를 욕조에 옮겨놓은 뒤 아파트에 불을 지른 혐의로 구속 기소돼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됐으나 2심에서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어 대법원은 98년 11월 유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고 서울고법은 2001년 2월 다시 무죄를 선고하는 등 8년간의 법정투쟁은 희비가 교차했다.

이씨는 변호인을 통해 기소한 검찰과 국가에 대해 민형사상 소송을 내겠다는 뜻을 밝혔다.


▽핵심 쟁점=이 사건의 핵심쟁점은 사망 시각. 95년 6월12일 오전 서울 은평구 불광동 M아파트 최씨의 집에서 최씨와 딸(당시 1세)이 숨진 채 발견되었고, 오전 8시20분 최씨 집 문틈에서 흰 연기가 새나오는 것을 목격한 경비원의 신고로 출동한 소방관들이 오전 9시40분쯤 최씨와 딸의 시신을 발견했다.

검찰과 경찰은 사망 현장에서 범행을 입증할 직접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

이씨의 유무죄를 판단할 중요한 증거로 검찰이 제시한 것은 숨진 최씨의 시반(시체에 나타난 반점)과 시강(시체의 굳은 정도) 등을 토대로 ‘사망시간이 이씨가 출근한 오전 7시 이전일 가능성이 높다’는 국내 법의학자들의 감정 결과이었다. 이씨가 출근하기 전에 최씨가 사망했다면 이씨의 연루 사실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죄 이유=그러나 2001년 2월 파기환송심을 맡은 서울고법 재판부는 “검찰은 간접적인 정황 증거만으로 이씨를 범인으로 단정했다”며 “이씨가 범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기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지만 유죄로 인정하기에 충분치 않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에 대해 컴퓨터 시뮬레이션 실험결과를 들이대며 화재 발생시간이 오전 7시 이전이라고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정확하지 않은 수치를 대입해 측정한 연산 결과만으로 발화 시간을 측정하는 것은 다분히 자의적”이라며 이를 물리쳤다.

더구나 당시 재판부는 스위스 법의학자의 증언을 근거로 시반과 시강 등으로 사망 시각을 추정하는 것은 오차 범위가 넓고 변수도 많아 정확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들어 “오히려 제3자의 범행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쐐기를 박았다.

▽판결의 의미=재판부는 이번 판결에서 범죄사실에 대한 엄격한 증명을 요구하는 ‘증거주의’의 원칙을 재확인했다. 재판부는 간접증거로도 증명력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면 범죄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는 점을 전제했으나, 검찰이 제출한 간접 증거로는 범죄 혐의를 입증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에 따라 최씨를 숨지게 한 진범이 누구인지는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남편 이씨는 ‘억울한 피고인’으로서 구제를 받았으나 어디에선가 웃고 있을 ‘살인범’을 밝혀낼 수사기관의 과제는 미결로 남았다.

정위용기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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