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 스케치]'한밤의 숨바꼭질'…불법 현수막과의 전쟁

  • 입력 2003년 3월 7일 18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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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오후 7시50분 서울 도심 한복판인 중구 무교동. 40대 남자 1명이 오토바이에서 내려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현수막을 쫙 펼쳐 가로수에 걸기 시작했다. ‘대리운전 080-×××-××××’. 숙달된 솜씨로 현수막을 거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2분 남짓.

“불법이란 걸 모르느냐”고 묻자 그는 “알지만, 나도 먹고 살아야 한다. 남들도 다 하는데…”라고 말하곤 황급히 사라졌다.

최근 서울의 거리 곳곳에 불법 현수막이 난무해 도시 미관을 해치고 있다. 가장 심각한 것은 대리운전 안내 현수막. 도심과 강남 등지의 가로변은 물론이고 한강 교량, 고가의 교각 아래, 터널 입구 꼭대기 등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서울의 25개 자치구가 올 들어 2월 말까지 수거한 불법 현수막은 6만4372개로 하루 평균 1091개에 이른다. 강남구에선 하루 130여개, 도심인 중구에선 하루 50여개를 수거한다.

자치구는 불법 현수막을 설치한 업주에게 10만∼4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한다. ‘옥외 광고물 등 관리법’에 따르면 과태료는 최고 300만원까지 가능하다.

불법 현수막은 야행성이다. 밤에 일제히 ‘진격’했다가 새벽이면 어딘가에 숨어버리는 게릴라 같다. 강남구의 경우 13명이 4개조로 나눠 오전 낮 오후 심야시간대에 단속하지만 워낙 게릴라식이어서 현장 포착이 쉽지 않다. 그래서 수거와 계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중구청 관계자는 “단속이 강화되면 현수막은 전신주나 터널 꼭대기같이 점점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면서 수거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현수막은 대개 사람을 고용해 건다. 한 대리운전 관계자의 고백.

“눈에 잘 뜨이는 곳이면 어디든지 현수막을 겁니다. 사람을 고용해 현수막 하나 거는 비용은 2000∼3000원입니다. 이 경우 걸기만 하면 되고 사후 관리는 책임지지 않죠. 한달 정도 사후 관리까지 해주는 경우엔 4만∼5만원 정도 듭니다.”

6일 오후 2시 서울지하철 2호선 강남역 주변. 강남구청 단속반이 불법 현수막을 수거하고 있었다. 현수막을 내걸려던 한 여성이 단속 차량이 나타나자 서둘러 현수막을 말아 달아났다.

강남구청 광고물정비팀 이동형(李東炯·49) 팀장의 설명.

“단속 차량이 나타나면 자기들끼리 전화로 정보를 교환하면서 단속을 피합니다. 허름한 차림의 아줌마를 시켜 현수막을 걸기도 하는데, 걸렸을 때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속셈이죠.”

울산시의 한 공무원이 얼마 전 ‘불법 현수막 제거 기구’를 개발했다는 얘기가 생각났다. 이 말을 전하자 옆에 있던 단속반원은 “우리도 이런 저런 장비를 다 사용해봤지만 무수한 현수막의 철사를 끊는 데는 역시 이가 잘 빠지지 않고 튼튼한 국산 낫이 최고다. 단속차량에 숫돌까지 준비해 다닌다”면서 웃었다.

단속 차량이 떠나려 하자 좀 전에 위기를 모면했던 여성이 멈칫 멈칫하며 골목길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불법이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현수막을 걸 태세다.

그때 이 팀장의 외침이 들려왔다.

“차 뒤로 돌려. 확실하게 수거하고 갑시다.”

이광표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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