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한국의 20대 어디로]열정 잃은 청년 실태

  • 입력 2003년 4월 3일 18시 19분


《“한마디로 올인(All in)하는 심정입니다….” 2년째 감정평가사(감평사) 시험에 매달리고 있는 권모씨(28·서울 관악구). 그는 마치 도박판에서 마지막 남은 돈을 모두 베팅하는 심정으로 시험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1998년 서울의 상위권 대학을 졸업했으나 그동안 보는 시험마다 낙방했고, 올해 시험까지 실패하면 나이 제한에 걸려 취직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취직은 어려울 것 같아 감평사 시험을 보기로 했어요. 그러나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허탈할 때가 많습니다. 1평짜리 고시원의 천장만 멍하니 바라보는 경우도 있고요….” 권씨의 목소리에서는 20대 특유의 패기와 열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전지역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지방대 출신 박모씨(27). 그는 지난 2년간 대기업과 중소기업 100여곳에 원서를 냈다 번번이 고배를 마신 뒤 인생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다고 했다.

“취업에 실패하면서 내가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 같아요. 자격 시험을 보는 것이 두렵고, 심지어 여자 친구도 사귈 자신이 생기지 않습니다. 때론 죽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한국 사회에 ‘청년 위기(Quarterlife Crisis)’가 확산되고 있다. 미래에 대한 자신감과 패기가 넘쳐나야 할 20대 중 상당수가 자포자기하거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빠져들고 있다.

취업문턱에서 좌절한 젊은이들은 물론 어렵게 일자리를 구한 20대들조차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이민을 꿈꾸고 있다. 또 그동안의 좌절과 실패를 한번의 시험으로 뒤집어 ‘인생 역전’을 하겠다는 청년들로 고시촌이 붐비고 있다.

지난해 10월 엔지니어링 회사를 퇴사한 조모씨(24·여·서울 강서구)는 무작정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했다. ‘한국에선 내가 설 자리가 없어보인다’는 게 이유.

서울 중구의 대기업에서 e비즈니스 관련 일을 하던 김모씨(27)는 이달 초 사표를 던졌다. 2년간 과로로 쓰러질 정도로 열심히 일했지만 어느 순간 “왜 매일같이 아등바등 살아야 하나?”라는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구체적인 진로도 결정하지 않은 채 퇴사를 결심했다. 문제는 김씨와 같은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는 점.

20대의 현실이탈과 방황은 이들이 심약해진 것도 원인이지만 사회 시스템에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는 분석이다.

올 초 연세대 발달심리학 연구실이 조사한 ‘한국 사회의 세대 집단과 라이프 스타일’ 연구 결과에 따르면 20대의 성공지향성은 기성세대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강했다. 게다가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경직된 사회분위기는 결국 청년들을 낙오자로 만들거나 현실도피로 몰아넣고 있다는 진단이다.

연세대 김농주(金弄柱) 취업담당관은 “대부분의 20대들은 첫 직장을 잘 구하지 못하면 곧 낙오자가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며 “특히 경제난이 심화돼 취업문이 더 좁아지면서 방황하거나 현실도피하려는 젊은이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통계청이 지난달 발표한 2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20∼29세 청년 실업률은 8.5%로 2001년 2월 이후 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한국 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현재 15∼29세 청년 4명 중 1명이 일자리가 없어 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동아일보가 최근 성인 1543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20대 응답자의 59.8%가 ‘가능하면 이민을 가겠다’고 답해 전체연령층(40.7%)보다 이민을 더 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선우기자 sublime@donga.com

장강명기자 tesomio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