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조 사과요구 받던 교장 자살

  • 입력 2003년 4월 4일 18시 23분


한 초등학교 교장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으로부터 ‘기간제 여교사에게 차 시중을 강요하고 전교조 비하발언을 했다’는 주장과 함께 서면사과를 요구받아 오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최근 일선 교육현장에서 발언권을 높이고 있는 전교조의 활동에 대한 논란이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자살 경위=4일 오전 10시경 충남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이모씨(85·여) 집 옆 은행나무 가지에 이씨의 아들인 예산 B초등학교 서승목 교장(58·사진)이 나일론 끈으로 목을 매 숨졌다.

서 교장의 부인 김모씨(52)는 “남편이 새벽에 홀로 계신 어머니 집에 들른다며 나간 뒤 돌아오지 않고 휴대전화도 안돼 찾아 나섰다가 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서 교장은 2월24일 부친상을 당한 뒤 매일 아침 노모를 문안하고 출근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인 김씨는 경찰에서 “남편이 최근 전교조 충남지부로부터 기간제 여교사 문제로 서면사과를 요구받자 자주 ‘괴롭다’고 말해왔다. 평소 하지 않던 술을 마시기도 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에 따라 서 교장이 전교조의 압력에 심적 부담을 느껴 자살한 것으로 보고 정확한 경위를 조사 중이다.

전교조는 지난달 31일 “서 교장과 같은 학교 홍모 교감이 기간제 교사에게 차배달을 강요하며 교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하며 이들에게 서면사과를 요구해왔다. 기간제 교사는 초등학교 교사가 크게 부족해지자 중등교사 자격증을 딴 교원 등을 한시적으로 임용하는 일종의 계약직이다.

▽사건 발단=‘차 시중’ 논란은 중등교사 자격증 소지자인 진모씨(25·여)가 3월3일 이 학교에 기간제 교사로 부임하면서 시작됐다. 홍 교감은 4일 “진씨가 학교에 나와 ‘차 한잔 타드릴까요’라고 먼저 말을 건네 ‘교장선생님에게도 한잔 타주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당시 진씨는 서 교장에게 차를 타주기도 했다”고 전화인터뷰를 통해 말했다.

진씨는 그러나 3월8일 홍 교감을 만나 “교장선생님께 차 드리는 것은 부담스럽다. 아이들 지도를 위해 교재공부할 것이 많다”며 항의했다는 것. 진씨는 이어 같은 달 20일 “차 시중에 수치심을 느꼈다”며 사표를 제출했으며 전교조 인터넷 홈페이지에 “하루에도 몇 번씩 (교장 교감이) 번갈아가며 수업에 들어왔다. (교장이) ‘윗사람이 시켜서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전교조야’라고 말했다”는 글을 올렸다. 진씨는 계약직이어서 전교조 회원이 아닌 상태다.

전교조측은 이 글이 올라오자 24일 B초등학교를 찾아가 조사를 벌였으며 이어 31일 30명이 예산교육청을 방문해 진 교사의 복직과 서 교장의 서면사과를 요구했다.

전교조측의 요구가 계속되자 서 교장은 “(진씨가) 중등교사 출신이라 초등학생 지도가 걱정돼 교실을 찾아가 장학지도를 한 것”이라며 “간섭으로 여겨졌다면 미안하다”며 구두로 사과했다. 그러나 서 교장과 홍 교감은 “차 시중을 들라고 강요한 적은 없다”며 전교조측의 서면사과를 계속 거부했다. 이 과정에서 진 교사는 4월1일 재임용됐다.

▽교육계 분위기=예산군초중등교장단협의회는 4일 서 교장의 자살과 관련해 성명을 발표, “교원단체 소속의 극소수가 허위사실로 교장을 비방해 죽음으로 몰고 갔다”며 “이는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한국교육 현장의 죽음이며 교육의 파탄”이라고 지적했다.

예산군초등교장협의회 회장 한규복 교장은 “서 교장은 1989년 제1회 충남교육대상을 수상하는 등 평소 교육신념이 투철했다”고 말했다. 서 교장은 군장교로 복무중인 두 아들과 출가한 딸을 두고 있다.

서 교장의 죽음이 알려지자 전교조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전교조의 지나친 요구에 항의하는 글이 잇따랐다. ‘슬픈제자’라는 ID의 네티즌은 “진씨는 세상을 좀 더 따듯하고 시야를 넓게 볼 수는 없었는가”라고 물었다. 또 “귀중한 생명을… 말도 안나온다” (‘분노를 삼키며’) “집단 이기주의로 교장선생을 자살로 몰았다”(‘근조’)는 의견도 올랐다.

한편 전교조 충남지부측은 “서 교장의 죽음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며 “그러나 서 교장의 죽음이 차 시중을 강요했다거나 전교조를 비하했다는 그간의 주장을 뒤엎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예산=이기진기자 doyoce@donga.com

예산=지명훈기자 mhj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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