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칼럼]이재갑/산을 정말 사랑한다면…

이재갑

얼마 전 휴가를 얻어 설악산에 다녀왔다. 계절은 완연한 봄인데도 속초 시내에서 바라본 대청봉 부근은 아직도 눈이 하얗게 자리잡고 있었다. 설악산 입구는 온통 벚꽃터널이었고 비수기라 인적마저 한산해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울산바위로 가기 위해 신흥사 입구 매표소에 도착하니 수학여행을 온 듯한 학생들이 떼를 지어 내려오고 있었다. 모두들 배낭도 없이 빈 물병 하나만 달랑 들고 산행한 탓인지 얼굴들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데 젊은이들의 그런 모습을 보며 들었던 상쾌한 기분은 신흥사를 지나면서부터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등산로 좌우에 빈 물병이 마구 버려져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던 것이다.

필자는 학생들에게 “버려진 물병을 주워 들고 내려가 달라”고 당부했다. 학생들 대부분이 순순히 부탁을 들어주었지만 일부 학생들은 아예 못들은 척하거나 거절하고 그냥 내려가기도 했다. 심지어 필자가 주워 준 병을 다시 산에 버리고 가는 학생도 있었다.

간혹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사들도 있었지만 물병을 버리는 학생들을 지적하거나 주의를 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계조암 부근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분이 빈병을 줍고 있어서 “항상 이렇게 많은 쓰레기가 버려지느냐”고 물었더니 “학생들만 왔다 가면 이렇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언젠가는 계조암 주지스님이 직접 인솔교사에게 오물 수거를 부탁한 적도 있었는데 그 교사가 그냥 내려가 버려 다시 소속 학교 교장에게 연락을 취하고 나서야 일행이 다시 올라와 쓰레기를 치웠다는 얘기도 했다.

흔들바위부터 울산바위 정상까지 700여 계단의 철사다리 양쪽은 물론 사다리 밑까지도 온통 빈병들로 가득했다. 연로한 할머니 한 분이 사다리 밑에서 쌀부대에 빈병을 주워 담고 있었다. 주워 담는 것도 어렵겠지만 할머니가 그 병들을 들고 가파른 산을 어떻게 내려갈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필자 역시 빈병 몇 개만 들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필자는 빈병 줍던 할머니와 오물에 몸살을 앓고 있는 설악산에 대한 미안함을 지울 수 없었다.

이재갑 공무원·서울 송파구청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