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 힘겨루기 혼란가중 우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봄의 노사협상이 대화와 타협이 아닌 힘겨루기로 혼란을 가중시킬 것이라는 예측이 난무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만큼 정부의 역할에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는 얘기다. 정부는 이미 두산중공업과 철도청의 노사협상 과정을 통해 말로만 분배정의를 강조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정부는 또 어느 정도 친노조 성향이 있다는 점을 스스로 부인하지 않았다. 자연히 재계와 보수층의 긴장과 반발이 커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집권층의 진보 성향 자체가 문제 해결의 걸림돌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어차피 구성원의 만장일치로 사회정의의 내용을 결정하기 힘들다면 투표장에서 다수가 선택한 선호(選好)를 용인하는 것이 민주국가의 질서다. 또한 현실적으로 볼 때 이념에 따른 정책선택보다는 정부의 무능에 따른 정책실패 때문에 국민의 후생이 감소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다소 진보적인 정책이라도 제대로만 시행되면 보수적인 유권자도 행복해질 수 있고, 대신 실패하면 사회적 약자들만 더 힘들어질 수도 있다.
참여정부의 개혁정책에 대해 걱정이 큰 것은 이념성 자체 때문이 아니라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능력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김영삼, 김대중 정부의 개혁은 군사독재의 잔재 정리, 경제위기 극복 등 국민적 합의에 바탕을 둔 정당성을 지녔는데도 결과가 신통치 않았다. 그런 자산이 없는 참여정부가 이념에만 매달려 개혁을 추진한다면 자연 반쪽의 정당성만 지니는 것이고, 이 경우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손해 보는 측을 설득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참여정부가 진정한 변화를 이루려면 무엇보다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보수와 타협하라는 것이 아니라 개혁의 실체부터 이해하라는 것이다. 사실 복지제도의 정비나 재벌체제의 개선 등 상당수의 개혁과제는 자본주의적 경제논리만으로도 정당화될 수 있는 것들이다. 결국 얼마나 좋은 정책을 펴 나가느냐가 관건인 셈이다.
노동시장의 경우 그 어느 분야 못지않게 시장의 실패가 만연해 있고 그만큼 정부개입의 여지가 크다. 그러나 정부가 뭐든지 성공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할 수 있다고 해도 다양한 정책목표 중에서 어느 한 곳에만 재원을 집중하기 힘들다. 결국 노동정책도 정책목표간의 조화와 우선순위를 고려하는 과정에서 체계적으로 수립돼야 한다. 기업경영을 투명하게 하고 복지정책을 체계화하는 일만으로도 노사문제의 부담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정부부터 신뢰 쌓아야 ▼
다음으로 제도적인 미비점을 살펴봐야 한다. 현실적으로 용인되는 노동권을 법제화하고 외국인 근로자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은 지금처럼 큰소리내지 않고 차분히 설득해나갈 수 있는 사안이다. 값싼 노동력이 들어오고 해외로 공장을 이전할 수 있는 개방된 현실에서는 기업보다 노동자들의 정치적 힘이 약해질 것이다.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노사관계법을 반대할 명분은 크지 않다. 법정근로시간처럼 실질적 임금협상에 준하는 사안의 경우 제도 자체의 찬반보다는 근로자 복지향상을 위한 여러 대안 중에서 우선순위인지를 따져야 할 것이다.
당장 부닥친 현안의 경우 정부가 직접 나서는 것과 한발 물러나 법과 관행을 존중해주는 것의 득실을 따져야 한다. 하나의 싸움을 말리려다 열개의 새로운 싸움이 발생할 수도 있다. 노사간의 신뢰회복을 도우려면 정부 스스로의 신뢰부터 쌓아야 한다. 정책의 힘은 신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전주성 이화여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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