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지용과 김동석
유 교수는 문학소년 시절부터 정지용을 유난히 좋아했다. 그는 “청록파 시인들도, 윤동주 김춘수도 정지용이란 선행 사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고 서정주 유치환 오장환 이용악 등에게도 그는 극복해야 할 반면교사(反面敎師)였다”며 정지용을 극찬했다. 정지용은 “우리 토박이말의 시적 가능성을 휘황하게 보여 줌으로써 후속 시인들에게 압도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그의 평가다.
그 무렵 좋아했던 또 한 사람의 문장가가 있었다. 좌파 문학평론가였던 김동석이다. “1947∼48년 한글로 글을 쓰던 사람 중 최고의 문장가였다”고 평가하는 김동석의 글은 매우 정확하면서도 패기가 있었다.
어린시절부터 책 읽기를 좋아해 방정환의 동화집, 이원수와 박목월의 동요집을 즐겨 읽었던 그는 좋은 책을 많이 읽기 위해서는 외국어를 하나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서울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그가 좋아했던 정지용과 김동석도 모두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사람들이었다.
그가 대학에 들어간 것은 6·25전쟁 직후인 1953년. 기본도서조차 구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대학생이 됐지만 강의실에서 영문학을 배우기보다는 당시 쉽게 구해 읽을 수 있었던 러시아소설(영어번역본)과 서머싯 몸, 토마스 만 등의 작품을 읽으며 혼자 공부를 해야 했다.
● 아우어바흐와 곰브리치
그는 27세인 1962년 첫 평론집 ‘비순수의 선언’을 세상에 내놨다. 대학 재학시절부터 잡지와 신문 등에 글을 쓰며 문명(文名)을 날렸던 그의 글은 일찍부터 인정받았다. 하지만 30대에 접어들면서 ‘저널리즘의 부평초’로 떠돌지 않기 위해서는 학문적 축적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고 공주사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71년 미국 뉴욕주립대(버펄로)로 유학을 떠났다.
이미 30대 후반에 접어든 그의 외로운 유학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러나 2년간의 유학 시기는 그의 생애 중 가장 충실하게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던 시간으로 기억된다. 베트남전 반대 시위가 한창이던 당시 미국 대학의 캠퍼스에서 허버트 마르쿠제, 죄르지 루카치 등 당시 필독서로 여겨지던 사상가들의 책과 함께 에리히 아우어바흐, 언스트 곰브리치, 월터 베냐민 등을 탐독했다.
아우어바흐에게서는 사회문화적 배경과 함께 문체 분석을 통해 글의 의미를 드러내는 방법을 배웠고 베냐민에게서는 깊이 있는 사고를 배웠다. 또한 곰브리치의 양식사적 접근 방식을 통해서 사회과학적 방법의 한계를 인식하며 문학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었다. 그는 이 때의 공부를 바탕으로 글에 대한 엄밀한 분석과 작품의 사회적 의미를 함께 고려하는 자신의 연구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이같이 문학 연구의 본질에 접근한 유 교수는 문학이 다른 학문과는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엄밀한 과학적 탐구방식을 지향하는 다른 학문과 달리 문학 연구는 궁극적으로 T S 엘리엇이 말하는 ‘비평적 지성(critical intelligence)’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비평적 지성은 학습을 통해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고전 연구가 아닌 현대문학 연구가 과연 학문의 영역에 포함되느냐에 대해 늘 유보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 문학과 비문학
그는 노선과 파벌이 중시되는 한국 문학계에서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고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는 자신이 “한 번도 문단의 주류에 속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문단의 많은 사람과 자주 어울려 다닐 기회가 없었다”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평론가 중 한 사람으로, 엄정한 자신의 독자적인 기준으로 작가와 작품을 평가하는 비평가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사회참여를 무시하고 현실감각이 없는 문학에는 동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학이 요구하는 관습상의 필수조건은 충족시켜야 문학작품이 된다는 것이 지론이다. 그래서 “위대한 문학이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것은 비문학적 기준이지만 그것이 문학이냐 비문학이냐를 판가름하는 것은 문학적 기준”이라는 엘리엇의 말을 즐겨 인용한다.
유 교수는 소설을 평가할 때 작가의 독특한 문체, 등장인물의 개성, 작가 자신의 희망과 좌절 같은 인생 경험의 투영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본다. 특히 소설가라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독특한 문체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언어예술인 시의 경우 언어 구사의 독자성을 더 중시한다. 그는 “한국에서는 산문과 운문의 구별이 분명치 않은 것이 문제”라며 “시는 시로서의 독자성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소리와 뜻을 잘 조화하는 데서 좋은 시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문단의 엇갈린 평가에도 불구하고 시인 서정주를 높이 평가한다.
● 영문학자에서 국문학자로
이화여대 영문학과에 재직하던 그는 1996년 연세대 석좌교수로 초빙돼 국문학을 가르치게 됐다. 한국문학 평론가로 줄곧 활동을 해 오기는 했지만 영문학자가 국문학 강의를 위해 초빙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대학을 옮긴다는 것은 그 자신으로서도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1990년대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한 비평활동을 펼쳐온 그는 국문학을 강의하며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유 교수는 특히 한국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주요 시인들의 시를 다시 찾아 읽으며 재조명하고 과장되거나 편협하게 평가돼 온 시인들을 다시 엄밀하게 평가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먼저 그 성과는 작년에 출간한 ‘다시 읽는 한국 시인’(문학동네)으로 나왔다. 앞으로 ‘다시 읽는 모더니즘’이란 제목으로 김기림 이상 등 모더니스트들을 재평가하는 글도 문학 계간지에 연재할 계획이다.
또 근래 학계에서 폭넓게 논의 중인 ‘근대성’ 문제를 한국 문학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려 하고 있다. 섣불리 서양의 이론을 원용해 논의를 공허하게 만들 것이 아니라 한국 근대문학을 면밀히 검토하며 그 안에서 ‘근대성’을 찾아 이야기하겠다는 생각이다.
이미 60대 후반에 들어섰지만 유 교수의 작업계획은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그에게는 변치 않는 분명한 원칙이 있다. 그것은 작가의 현실 및 작품에 대한 치밀한 독해와 분석이다. 그는 이 원칙에 입각해 시문학사도 쓰고 계간지에 연재 중인 ‘나의 해방 전후’도 책으로 낼 계획이다. 문학평론가로서, 격변의 시대를 산 역사 앞의 한 개인으로서 문학을 통해 세상을 냉철하게 바라보는 그의 여정은 계속된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말 하나의 차이가 세계의 명멸을 빚어내는 서정시의 장(場)은 미시적인 감각과 지각의 세계이다. 역사의 행방과 인류의 명운과 있어야 할 사회에 대해 불철주야 관심하고 모색하는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미미하고 소소하며 하찮은 세계로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미미하고 소소한 것에 대한 섬세한 반응 없이 시 자체의 온전한 경험은 불능하다. 그러므로 미시적 관심의 장인 서정시의 세계로 들어서서는 일단 거시적 관심의 잠정적, 자발적 정지가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을 때 사실상 시세계의 부정으로 나갈 위험성이 많다. 터놓고 부정하지 않더라도 공리주의적 순위의 상상적 책정은 시를 문화의 하층 주변부로 떨어뜨릴 것이다. 시 자체의 온전한 경험과 선별 능력의 제고가 요청되는 이때 시론이나 시인 연구가 담론적 편의로 운영되기보다 가치지향적으로 전개되기를 희망한다.
(‘서정적 진실을 찾아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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