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형 열린마음 열린세상]어느날, 건널목에서

  • 입력 2003년 5월 28일 18시 04분


건널목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행 신호가 켜지자 사람들은 종종걸음, 8차로인데도 우리 병원 앞 신호등은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신호가 바뀐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한 여자아이가 눈에 띈다. 다리가 불편해 걸음이 느리다. 모두들 다 건널 즈음인데도 이 아이는 아직 중앙선을 넘지 못하고 있다. 보기에도 안쓰럽다.

그때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두 아이가 뒤늦게 건널목을 건너려고 뛰어든다. 물론 그 아이들의 걸음으로는 무사히 건너기에 문제가 없다. 한데 뒤처져 건너는 여자아이를 발견하곤 아이들이 걸음을 멈춘다. 그리곤 무슨 약속이나 한 듯 한 걸음쯤 뒤처져 여자아이를 따라간다. 그가 눈치 못 채게 하려는 게 분명해 보인다.

자칫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다. 혹은 자신들의 배려에 행여 부담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아이들의 세심한 배려가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신호는 꺼졌고 다리는 불편하고, 슬슬 차가 움직이는데 얼마나 불안할까. 인간은 이런 순간 깊은 소외감, 고독감에 빠지게 된다. 이럴 때 함께 걷는다는 건 그 아이의 불편을, 아픔을 함께 나눠 갖겠다는 것이다.

중앙선을 겨우 넘자 신호가 벌써 바뀌었다. 아이들은 손을 들어 운전자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여자아이도 안간힘을 쓰는 게 뒤에서 봐도 역력하다. 그 아이는 부축을 필요로 하는 것 같진 않아 보였다. 그저 느릴 뿐이었다. 거기다 오른쪽 어깨에 가방까지 흔들거리니 더 힘들어 보였다. 가방을 들어주랴, 남자아이가 조심스레 손을 내민다. 여자아이가 고개를 흔든다. 그리곤 몇 걸음 옮기더니 가방을 벗어준다. 남자아이가 쑥스럽게 받아든다. 여자아이도 지금쯤 이 남자아이들이 왜 뜀박질을 멈추고 자기 옆을 ‘호위’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렸겠지. 이젠 외롭지도 무섭지도 않다. 그 따뜻한 배려가 고맙다. 가방을 들어 주겠다는 호의도 고맙다. 그렇다고 체면 없이 벗어주기엔 미안하고. 하지만 행여 남자아이가 무안해 하지나 않을까…. 이런 생각들이 바쁘게 오갔겠지.

내게 이 장면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믿음과 사랑을 나눈 감동적인 순간이다. 아스팔트 정글, 붉은 신호를 건너고 있는 긴장의 순간, 성급한 운전자들이 차마 출발은 못하고 으르렁대는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이 아이들이 보여준 믿음과 사랑의 나눔은 한 편의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생면부지의 아이들, 그들 사이엔 한 마디 말도 없다. 하지만 거기엔 따뜻한 인정의 가교가 놓여 있다.

이 아이들이 다 건너기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려준 운전자들도 고마웠다. 누구 하나 클랙슨을 울리지 않고 조용히 기다릴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했다. 그들도 이 아름다운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마음속으로 수채화를 그리고 있었겠지. 신호가 바뀌기도 전에 클랙슨을 울리며 출발하는 한국인의 운전 습관으로선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사히’ 건너온 사내아이들이 가방을 내민다. 여자아이가 가벼운 목례를 하고 받아든다. 그리고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 간다. 저만치 가던 사내아이들이 뒤돌아본다. 붐비는 차 사이로 잘 보이진 않지만 ‘잘 가!’ 하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릴 듯하다.

저 아이들이 각박한 도심의 살풍경을 장미꽃 화원으로 바꾸어 놓았다. 회색빛 거리가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대단한 아이들이다. 달려가 덥석 안아주고 싶다.

택시가 내 앞에 멈춰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난 그 아이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어떤 아이들일까? 아! 요즈음 세상에도 아이를 저렇게 가르치는 부모가 있구나. 어떤 사람들일까? 그 아이들의 가정 분위기까지 궁금해진다.

불과 몇 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한 편의 아름다운 영화를 본 듯 황홀했다. 난 그날 오후 내내 이 생각으로 흐뭇하고 즐거웠다.

요즈음 아이들! 말만 들어도 우린 혀를 차고 고개를 내젓는다. 하지만 주위엔 아름다운 아이들도 많다. 그게 안 보인다면 ‘요즈음 어른들’ 모습은 어떤지 우리 자신을 되돌아봐야 한다.

이시형 사회정신건강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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