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김광현/勞-使 아닌 勞-靑관계?

  • 입력 2003년 6월 16일 18시 22분


16일 오전 106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서울 남대문로 조흥은행 본점 건물. 이 은행 노조 간부들은 조흥은행 매각을 반대하는 ‘성토 집회’를 가졌다. 그리고 남녀 조합원 7224명의 사표(辭表)를 제출하러 갔다. 노조 집행부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은행장실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은행 바로 옆에 대기하고 있던 청와대행(行) 버스였다.

“국민의 세금인 공적자금이 들어갔으니 조흥은행은 국민의 것이고 국민의 대표는 대통령이니 대통령에게 사표를 제출하겠다”는 게 노조가 내세운 논리였다. 대통령이 은행 직원의 사표를 받을 이유가 없고, 법적 권한도 없는 줄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청와대에 사표를 낸다는 식의 ‘이벤트’를 벌이는 데는 나름대로 계산이 있을 것이다.

현 정부 출범 후 국가 전체를 ‘흔들 만한’ 경제관련 노사분규를 꼽으라면 두산중공업, 철도, 화물연대의 경우다. 노조측의 ‘3전 3승’으로 끝난 이들 분규는 집행 과정과 해결 패턴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시간을 끌면 정부, 특히 청와대가 개입해 타협을 촉구하고 노조의 승리로 끝난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다시 파업이 이어지는 순서다.

노동부 장관이 창원 파업현장에 직접 나타나 중재하면서 노조의 손을 들어준 두산중공업이 그랬다. 철도 분규에서는 “철도를 포함한 전기 가스 등 망(網)사업의 민영화는 신중해야 한다”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발언이 철도 노조측에 힘을 실어주었다. 대통령의 핵심측근인 문재인(文在寅)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이 직접 나선 화물연대 사태는 말할 것도 없다.

조흥은행 분규는 어떤가. 지금까지는 앞선 3건의 대형 분규와 거의 비슷한 순서를 밟아오고 있다. 지난해 이후 노정(勞政) 갈등이 끊이지 않았고 청와대 직접 개입도 그렇다.

김진표(金振杓) 경제부총리는 이날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불법 행위가 발생한다면 강력한 민사 형사조치를 포함해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히 대처하겠다”고 말했다. 역대 정부에서 일어난 대형 파업사태에서 거의 빠진 적 없는 발언이지만 노무현 정부 들어서는 사실상 ‘사문화(死文化)’된 문구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 사태의 해결 방식은 국내뿐 아니라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범 100일을 넘긴 새 정부의 경제관-노사관이 변했는지 여부를 보여주는 시금석(試金石)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김 부총리가 기자회견 말미에 강조한 “이번에는 말보다 행동을 통해 보여 주겠다”는 강력한 의지 표명이 실제로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김광현 경제부기자 kk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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