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미기자의 현장칼럼]10人의 '행복' 릴레이

  • 입력 2003년 7월 3일 16시 39분


행복은 나의 우산을 남에게 양보해 씌워 주는 데서부터 싹트는 것이 아닐까. 지난달 30일 서울 광화문 동아미디어센터에 ‘행복을 주는 사람’들이 모여, 릴레이 인터뷰가 진행된 순서대로 섰다. 왼쪽부터 이주호 조성곤 김영환 문병대 박수부 어효선 신은정 조희창 김명환씨. 네번째 순서인 허태학씨가 빠졌다.   신석교기자 tjrry@donga.com

행복은 나의 우산을 남에게 양보해 씌워 주는 데서부터 싹트는 것이 아닐까. 지난달 30일 서울 광화문 동아미디어센터에 ‘행복을 주는 사람’들이 모여, 릴레이 인터뷰가 진행된 순서대로 섰다. 왼쪽부터 이주호 조성곤 김영환 문병대 박수부 어효선 신은정 조희창 김명환씨. 네번째 순서인 허태학씨가 빠졌다. 신석교기자 tjrry@donga.com

한자리에 모인 행복을 주는 사람들

《지난달 30일 오후 7시 반 서울 광화문 동아미디어센터에 ‘행복을 주는 사람’들이 한데 모였다. 취재에 응해준 10명 중 부득이한 선약으로 불참한 삼성 석유화학 허태학 사장을 뺀 나머지 9명이 약속 시간을 단 1분도 넘기지 않고 도착했다.

서로의 존재를 모르던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행복을 준다는 공통점으로 만나 정담을 나누는 풍경은 가슴 뭉클한 것이었다.

릴레이의 출발점이었던 가수 이주호씨는 “이번 인터뷰는 10명으로 그쳤지만 행복을 주는 사람의 네트워크는 100명, 1000명으로 계속 확장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뷰를 진행하며 ‘행복을 주는 사람’에서 가족을 제외해줄 것을 당부했었다. 그러나 행복을 주는 사람들은 “늘 마음 속에 지닌 최고의 행복은 가정”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얼굴에서 발산되는 환한 기운의 근원지를 알 것 같았다.》

‘행복’이란 단어의 어감은 세련되지 않지만 거기에는 인간의 원초적 그리움이 배어 있다.

‘네트워크’란 단어는 복잡성 과학을 풀어낼 수 있는 키워드이지만 딱딱하고 어렵다.

행복과 네트워크를 조합시킨 ‘행복 네트워크’는 어떤 패턴으로 전개될까.

실망스럽고 고단한 뉴스를 접하며 사람들의 일상에 ‘행복을 주는 사람’을 찾고 싶어졌다. 1978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허버트 사이먼은 과학의 목적을 “무질서한 복잡성에서 의미 있는 단순성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했다.

A라는 사람에게 “당신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묻고 그 사람이 지명한 B라는 사람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지는 릴레이 인터뷰를 시도했다. 1980년 ‘행복을 주는 사람’이란 노래를 발표한 가수 이주호씨가 행복 네트워크의 출발점이 됐다. 시간과 지면의 제약을 고려해 릴레이는 10번째 사람에서 마치기로 했다.

● 단지 곁에 있다는 것 만으로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대 함께 간다면 좋겠네.(중략) 이리저리 둘러봐도 제일 좋은 건 그대와 함께 있는 것….’ (‘행복을 주는 사람’ 중에서)

기자가 전화를 건 지난달 25일 오전 이주호씨는 전날 지방 공연에서 돌아와 잠 기운 가득한 목소리로 수화기를 들었다. 처음 “신선한 질문으로 아침을 열어준 기자”를 ‘행복을 주는 사람’이라고 지목했던 그는 “직접 릴레이에 개입하고 싶지 않다”는 기자의 부탁에 따라 서울 송파구 잠실동 ‘주님의 교회’에서 음향을 담당하는 조성곤씨의 이름을 댔다.

1985년부터 1990년까지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라이브클럽 ‘화려한 목요일’에서 이씨 다음 순서로 포크송을 불렀다는 조씨는 이씨가 곡이 잘 안 써질 때, 군중 속에서 외로움을 느낄 때 단지 곁에 있어준다는 이유로 행복을 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조씨는 처음엔 고(故) 헨리 나우엔이란 신부를 소개했다. 1990년대 음향 회사와 음반 제작회사를 운영하다가 외환위기 때 사업에 실패해 매일 자살을 생각하던 시절, 그가 쓴 책 ‘영적 발돋움’, ‘상처 입은 치유자’ 등을 읽으며 삶의 의욕을 되찾았다고.

릴레이는 계속돼야 한다. 조씨는 대신 삼성 에버랜드㈜ 유통사업부 고객만족실 김영환 실장을 떠올렸다. 조씨와 같은 교회에 다니던 김씨는 우울증 열등감 강박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한 교회 내 ‘한마음 치유 공동체’에서의 봉사활동을 조씨에게 권했다. “사람들이 모여 함께 섬기는 미덕을 가르쳐 준 사람”이 김씨다.

● 뜻밖의 곳에서도 행복은 찾아오고

김씨는 1997년부터 2002년까지 삼성 에버랜드㈜ 사장을 지낸 삼성 석유화학 허태학 사장을 꼽았다.

“허 사장님은 직원들의 대소사를 손수 챙기고 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친절로 직원들을 대했습니다. 나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사람이 바로 행복을 주는 사람 아닐까요.”

허 사장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은 삼성전자㈜ 문병대 고문이었다. 30여년 전 같은 회사 선후배 사원으로 처음 만나 쌓아온 우정은 서울 북한산 도봉산과 지리산 속리산 등 명산을 함께 오르며 풍월을 읊는 것으로 지금까지 계속된다.

허 사장은 문 고문을 가리켜 “감상적이며, 시적이며, 음악적인 사람이다. 오랜 직장생활에서 잃기 쉬운 로맨스와 소년 같은 순박함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 고문은 2000년 암으로 세상을 뜬 아내의 대학 동창인 광고제작회사 CM파크 박수부 대표에게서 행복을 느낀다.

“1990년대 중반 아내와 함께 강화도로 여행을 갔다가 그곳에 촬영 온 박 대표를 소개받았죠. 그를 만나면 아내 생각이 나요.”

아내의 조의금으로 들어온 돈 1억원을 암 치료 예방기금으로 내놓은 문 고문이다.

박 사장에게서 아동문학가이자 석동문학연구회 회장인 어효선씨로 릴레이가 연결되기까지의 짧지 않은 과정 설명이 필요하겠다.

당초 박 사장에게 행복을 준 사람은 박 사장의 사무실이 있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 일대 나무에 살충제를 뿌리는 50대 남자였다.

“종로구 신문로에 있는 집 정원의 나무에도 살충제를 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를 불렀는데 오지 않았어요. 그를 기다리며 석류나무를 살펴보니 꽃에 벌들이 모여 앉은 거예요. 그가 왔더라면 벌들이 죽었겠죠. 다음날 사무실로 찾아온 그는 우리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은 메모를 잃어버렸다며 연신 사과했지만 저는 오히려 와 주지 않은 그에게 감사했어요.”

행복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전이된다.

그러나 ‘살충제 아저씨’의 연락처를 만 하루 동안 수소문했지만 찾을 방도가 없었다. 날이 맑을 때면 매일 오전 10시쯤 사무실 근방에서 우렁찬 목소리로 “김밥이요”를 외쳐 생활의 활력을 준다는 김밥 파는 아주머니도 취재가 진행되는 동안 비가 계속 오는 바람에 만날 수 없었다.

●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박 사장이 마지막으로 소개한 사람이 어효선씨였다.

“난 기르기와 그림을 좋아하는 선생님은 ‘그리움이 그림이다’라고 말씀하세요. 천진난만한 웃음과 올곧은 자세를 노년까지 지키고 계셔서 뵐 때마다 행복해요.”

동요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등을 작사한 어씨의 말에는 행복에 대한 경건함이 있다.

“행복은 번번이 쉽게 느끼는 게 아니에요. 나이가 많이 들었으니 아침에 눈을 떠 몸이 편안할 때가 행복이라고 할 수 있나. 아내와 더불어 6년을 동고동락한 개 2마리도 식구 같고…. 굳이 한 사람을 추천하라면 문공사 신은정 편집부장이에요. 가끔 출판인들이 회합하면 나를 마포구 서교동 집 문간까지 꼭 배웅해줘요. 말로는 가라고 해도 정성을 베푸는 그녀에게서 행복을 느껴요.”

신은정씨는 마음 맞는 사람들에게 ‘메이드 인 조희창’이라는 타이틀을 달아 좋은 음악을 콤팩트디스크에 담아 선물하는 음악평론가 조희창씨를, 조희창씨는 “나무와 개가 있는 레스토랑의 철학을 실천하는” 레스토랑 ‘아지오’ 대표 김명환씨를 각각 ‘행복을 주는 사람’으로 꼽았다.

기사 집필을 마친 늦은 밤, 도시의 하늘을 올려다본다. 어느 천문학자는 “천문학(天文學)은 문학(文學)이다”라고 말했다. 카시오페이아, 직녀, 작은 여우, 사냥개, 목동, 도마뱀…. 무수히 많은 조합으로 연결될 수 있는 서정적인 별들은 곧 우리 자신일 수 있다. 당신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은 누구인가. 누군가에게는 당신도 분명 행복을 주는 사람이다.

▼'행복을 주는 사람' 릴레이 참여자▼

○1이주호씨(47·듀엣 ‘해바라기’ 멤버)

○2조성곤씨(46·‘주님의 교회’ 음향 담당)

○3김영환씨(43·삼성 에버랜드㈜ 고객만족실장)○4허태학씨(59·삼성 석유화학 사장)

○5문병대씨(62·삼성전자㈜ 고문)

○6박수부씨(58·CM파크 대표)

○7어효선씨(78·석동문학연구회 회장)

○8신은정씨(40·문공사 편집부장)

○9조희창씨(40·음악 평론가)

○10김명환씨(51·레스토랑 아지오 대표)

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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