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제 연구의 전문가이자 김대중(金大中) 정부에서 초대 중앙인사위원장을 지낸 김광웅(金光雄) 서울대 교수가 파악한 한국의 정부조직은 유감스럽게도 인재가 맘껏 기를 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관료조직은 엄격한 규칙과 절차에 따라 움직이는 계급조직이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특히 한국의 관료조직은 반드시 단계적으로 계단을 밟아 올라가도록 돼 있어요. 홈런을 친 선수라도 반드시 1∼3루를 다 돌고 홈에 들어와야 득점을 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김 교수는 현대의 조직은 유럽식 축구경기와 같은 수평 매트릭스 조직, 그리고 네트워크 조직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선후배간 위계나 계급이 우선되기보다는 일과 역할로 승부를 가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김 교수가 중앙인사위원회를 처음 맡았을 때, 이 조직은 전형적인 관료조직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다만 조직이 작고 새로 탄생했다는 점에서 규범을 만들기가 상대적으로 쉬웠다.
“50평을 쓸 수 있게 돼 있는 장관급 기관장의 권한을 포기하고 17평 사무실에서 일했습니다. 안락의자에 앉지 않고 서서 의견을 듣고 결재하는 스타일을 고수했어요. 결재는 집무실뿐 아니라 비서실, 심지어는 계단에 서서도 해 줬죠.”
그는 또 회의실에서도 상석(上席)을 고집하지 않고 사무관부터 의견을 말하도록 했다.
1년이 지나면서 중앙인사위는 탈(脫)관료적인 유연한 조직으로 분위기가 바뀌어 갔다. 그러나 이 같은 변화를 김 위원장 혼자서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핵심 과장들 가운데 자신과 리듬을 같이하며 변화를 뒷받침한 인재들이 있었기에 조직 혁신이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국립의료원장을 뽑을 때였어요. 관례대로 1순위로 올라온 사람 대신 2순위로 올라온 사람을 뽑자고 주장한 실무 간부가 정하경(鄭夏鏡·현 인사정책 심의관) 총괄기획과장이었어요. 1순위자가 비록 현직이기는 하지만 병원운영 과정에서 빚을 많이 져 더 이상 리더십을 연장시키면 곤란하다는 논리였죠.” 이렇게 뽑힌 국립의료원장은 업무에서 많은 성과를 냈고 현재 3년 임기를 연임하고 있다.
정 과장과 김성렬(金聖烈·현 대통령 인사보좌관실 행정관) 심사과장은 인사위 발족 직후 조달청 차장 승진 인사 때도 상급기관인 재경부의 반발을 무릅쓰고 재경부 출신 1순위 대신 2순위였던 조달청 국장을 발탁 승진시켰다.
김 교수는 김명식(金明植·현 인재정보심의관) 인사정책과장에 대해서는 “머리가 좋은 사람만이 아니라 공직을 제대로 수행할 인재를 뽑자는 소신 아래 정부 수립 이래 현안이었던 행정고시 제도를 개편한 인물”로 꼽고 있다.
새로운 아이디어의 적정성에 관해 순발력 있게 판단할 수 있도록 해 준 박수영(朴洙瑩·현 미국 버지니아대 박사과정) 정책담당관과 각 부처의 저항을 무릅쓰고 국장급 131개 자리를 개방형으로 전환토록 설득해 낸 박기준(朴基俊·현 갈립 회계법인 대표) 직무분석과장도 김 교수가 꼽는 인재들이다.
“이들 인재는 스스로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든 평등조직과 그 분위기 때문에 탄생할 수 있었고, 이들은 다시 자기 과원들의 존중을 받으며 그런 수평적 조직을 만들어 나갈 수 있었어요.”
김 교수는 특히 현대사회에서 인재가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기 위한 조직은 ‘계급(hierarchy)’이 아니라 ‘순환(heterarchy)’이 지배하는 조직이라고 역설한다.
“이건 현대 행정학 이론이지만, 막상 제가 현실세계에 적용해 보니 실감이 나더군요. 신경계 조직이 나무처럼 줄기와 가지가 있는 피라미드 같은 조직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관찰해보니 뉴런 A가 뉴런 B에 영향을 주고 B는 C에 영향을 주며 C는 다시 A에 영향을 주는 순환조직이더라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조직은 수평이면서 행렬식(매트릭스)으로 얽히고 동시에 네트워크로 연결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인재는 그런 조직에서만 탄생할 수 있을 겁니다.”박성원기자 sw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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