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복을 빕니다]민주화 代母 조아라 여사

  • 입력 2003년 7월 9일 19시 05분


2000년 9월 제14회 인촌상(공공봉사부문)을 수상한 조아라 여사.-동아일보 자료사진
2000년 9월 제14회 인촌상(공공봉사부문)을 수상한 조아라 여사.-동아일보 자료사진
8일 오랜 와병 끝에 타계한 조아라(曺亞羅) 여사는 호남권 여성단체를 이끌면서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하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아 ‘광주 재야(在野)의 어머니’로 불려왔다.

조 여사는 1912년 전남 나주시 반남면에서 태어나 1927년 광주 수피아여고를 졸업했다. 당시 이 학교 교사로 광주 YWCA를 창립했던 김필례(金必禮) 여사와 만난 것이 계기가 돼 1945년 이 단체에 발을 디뎌 60년 가까이 총무 회장 명예회장을 맡아 왔다.

일찍이 암울한 식민지 조국의 현실에 눈을 떴던 고인은 여고 졸업 후 광주학생독립운동(1929년)과 관련된 ‘백청단 은지환사건’의 주동자 중 한 명으로 몰려 1931년과 1936년 각각 한 달 동안 구금됐다.

고인은 2000년 9월 제14회 인촌상(仁村賞·공공봉사부문) 수상 인터뷰에서 “엄동설한에 가둬 두어도 내가 입을 열지 않은 데다 일경들도 어린 내가 안쓰러웠는지 결국 풀어줬다”며 “당시 꽁꽁 언 내 모습을 보고 취재차 왔던 동아일보 기자가 나와 함께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고인은 생전에 여성운동과 관련해 “일제강점기와 전쟁의 와중에서 더욱 어둡고 어려운 삶을 이어 온 우리 여성들이 이만큼이나마 당당하게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이 정말 대견스럽다”며 “이는 우리 사회발전의 증거인 동시에 내 일생의 큰 보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6·25전쟁 후 ‘성빈여사(聖貧女舍)’를 설립해 1000여명의 전쟁고아소녀들을 돌보았으며, 1962년에는 소외계층 여성의 직업훈련 및 사회적응을 돕기 위해 ‘계명여사(啓明女舍)’를 설립 운영해 왔다. 계명여사는 현재 ‘계명여성복지관’으로 확대 운영되고 있다.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항쟁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한 혐의(내란음모)로 6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 20년 가까이 이어진 ‘5·18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투쟁’에도 헌신하면서 유족과 부상자 구속자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데 앞장섰다.

광주에서 고인을 지켜봐 왔던 남종화의 대가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 선생은 생전에 고인의 인품과 열정에 감복해 ‘소심당(素心堂)’이라는 호를 지어 주기도 했다.

고인의 애제자이며 광주YWCA 사무총장을 지낸 민주당 김경천(金敬天·광주동) 의원은 “고인은 옳은 일에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었으며, 항상 자신보다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사로 평생을 일관해 오셨다”며 애통해 했다.

광주=김권기자 goqu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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