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칼럼]김재환/마음이 배불렀던 ‘통닭 반마리’

  • 입력 2003년 8월 7일 18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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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환
정년퇴직한 70대 노인이다. 결혼 47주년 기념일이 마침 중복이어서 아내와 서울 중구 북창동의 유명한 삼계탕 집을 찾았다. 손님이 많아 40대 중반쯤 돼 보이는 부부와 합석을 했다. 삼계탕을 먹으면서 이 집 통닭구이가 맛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한 마리를 시키면 아무래도 남길 것 같아 반 마리를 시키려는데 종업원이 반 마리는 주문이 안 된다고 거절하는 게 아닌가. 그때 같이 앉아 있던 부부가 종업원에게 “한 마리를 반으로 갈라오면 앞 손님들과 나눠먹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르신들을 뵈니 건강하고 금실이 좋아 보여 시골 부모님 생각이 납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요즘처럼 나밖에 모르는 세태에 ‘고향 부모님’을 얘기하는 것이 뜻밖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이들 부부는 서둘러 종업원을 불러 통닭 한 마리 값을 계산하려 했다. 우리 부부는 반 마리 값을 내겠다고 했으나 그들은 “먼 훗날 우리 인생 후배가 저희에게 닭 반 마리 정도는 사주지 않겠습니까”라며 환하게 웃었다. 옷차림으로 봐서 그리 넉넉한 살림은 아닌 듯 보였음에도 그들은 한사코 계산을 하고 가게를 떠났다.

작년에 율사 출신의 한 여성 국회의원이 자기 아버지 연배의 정치인에게 욕을 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어떤 이유에서 그랬는지를 떠나 울분을 금할 수 없었다. 아무리 숭고한 뜻을 좇는다 해도 연륜과 인륜을 팽개치며 이를 성취할 수는 없는 법이다. 반면 생면부지의 노부부를 보며 고향의 부모를 떠올린 그들, 어르신들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도 선뜻 닭 반 마리를 ‘봉양’한 그들 부부는 필자의 기억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희수(稀壽)를 넘도록 살면서 그렇게 맛있고 영양가 높은 통닭을 먹은 기억이 없는 것 같다. 정쟁과 잇따른 부정부패로 나라는 어수선하지만, 이 같은 사람들이 있기에 대한민국의 앞날에는 아직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15일은 선현들이 값진 피땀을 흘려 맞은 광복절이자 말복이다. 뜻 깊은 그날, 점심 때 북창동의 삼계탕 집에 가서 이번에는 객지에 나가 살고 있는 자식의 안위를 묻는 부모의 심정으로 그 중년 부부를 초대하고 싶다.

김재환 서울 동작구 노량진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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