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 학원가 르포]“취업문 뚫는 탈출구” 공무원시험 열풍

  • 입력 2003년 8월 13일 18시 54분


최근 경기 침체로 인해 취업난이 심화되면서 공무원 시험 열풍이 불고 있다.

졸업반 대학생들은 물론 30대 직장인, 그리고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사람들까지 대거 공무원 시험 준비에 나서고 있는 것. 올해 7, 9급 서울시 지방공무원의 경쟁률은 무려 150 대 1로 지난해 80 대 1보다 2배 가까이 높아졌을 정도다.

12일 오전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의 한 공무원 시험 전문학원.

이미 이른 아침부터 강의실 앞 복도에는 50여명의 수강생들이 신문지와 방석 등을 깔고 줄지어 앉아 있었다. 강의는 오후 2시나 돼야 시작하지만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3, 4시간 전부터 기다리고 있는 것.

이미 2시간 이상 기다리고 있다는 유모씨(28·여)는 “이렇게 해도 앞자리를 차지하기는 쉽지 않다”며 “유명 강사의 강의를 듣기 위해 이 정도 수고는 아무 것도 아니다”고 말했다.

올해 초 다니던 무역회사가 부도가 나 이제 공무원이라는 안정적인 직장을 잡기 위해 학원에 다니게 됐다는 유씨는 내년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부근의 다른 공무원 시험 전문학원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300∼400명을 수용하는 대형 강의실조차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몰려들어 콩나물시루를 연상케 할 만큼 붐볐다.

노량진역 인근 L학원의 경우 3층에 마련된 휴게실에는 쉬는 시간에도 20여명의 수험생들이 녹화된 강의 비디오를 보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H고시학원의 상담원 박병채씨(32)는 “취업난이 심해지면서 아예 부모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자녀를 데리고 학원수강 상담을 하러 오기도 한다”며 “인기 강의를 듣기 위해 등록 전날 밤부터 밤을 새우는 학생들도 부지기수”라고 말했다.

유명 강사가 강의하는 강좌의 경우 수강신청 2, 3시간 만에 접수가 마감돼버려 강의당 2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수강신청을 못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대형학원들은 수강신청을 못한 학생들을 개별적으로 상담해 ‘선별 구제’를 해주기도 한다는 것. 물론 추가 등록 경쟁률도 만만치 않게 높다고 학원 관계자는 귀띔했다. 수강신청에 실패한 사람들을 위해 따로 반을 편성하는 학원들도 꽤 있다.

학원 관계자들은 20여개의 공무원 시험 전문학원이 밀집한 노량진동 일대에만 행정직, 법원직, 경찰공무원직 등의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이 최소 1만여명 선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수강신청을 미처 못하고 다른 곳으로 돌아가거나 아예 온라인 강좌를 신청하는 경우를 포함하면 2만명에 가까운 수험생들이 매년 노량진 학원가로 몰려들고 있는 셈.

한 대형 고시학원 관계자는 “올해 수강생들이 지난해에 비해 20% 정도 늘어난 것으로 추산된다”며 “방학 때는 재학생들이 급증해 불과 몇 시간 만에 수강신청이 마감되기도 한다”고 전했다.

이같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이 급증하는 바람에 인근 지역 100여군데의 독서실과 고시원도 빈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 결혼 후에도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최근에는 여성 수험생들도 급증하고 있다.

공무원직에 대한 인기가 이같이 높은 것은 취업난뿐만 아니라 정년이 보장되는 등 사기업체에 비해 안정성이 높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지난해 3월부터 7급 일반행정직을 준비해온 권모씨(34)는 “공무원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지고 있어 이 길을 택하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지난해 초 군복무를 마치자마자 9급 법원직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대학생 김모씨(24)는 “체감 경기가 안 좋은 것이 피부로 느껴져 안정된 직장을 찾으려고 했다”며 “경쟁률이 엄청나지만 그래도 주위에서 합격하는 사람들을 보며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과도한 공직 선호 현상에 대한 우려도 있다. 김농주(金弄柱) 연세대 취업담당관은 “각 분야에서 인재들이 전문성을 발휘해야 하는데 공직 쏠림현상이 지나칠 경우 국가적 손실이 우려된다”며 “단순 암기형 시험 방식도 해당 분야의 직장 경험을 가진 사람에 한해 전형 기회를 주는 방식 등으로 시스템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유재동기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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