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빨리 죽어야 네가 장가를 가는데….”
일본군 위안부 출신인 여복실(呂福實·82) 할머니와 양아들 박근몽(朴根夢·36·목수)씨가 평소 서로를 생각하며 나누는 애틋한 대화다.
박씨는 거동이 어려워 끼니조차 해결하기 어려운 여 할머니를 어머니로 맞아 12년째 손발이 되어주고 있다.
여 할머니와 박씨가 인연을 맺은 것은 1991년. 당시 여 할머니는 인천 연수구 옥련동 판잣집 쪽방에서 돌봐주는 사람 하나 없이 외롭게 혼자 살고 있었다.
박씨는 어렵게 살고 있는 할머니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쪽방을 찾아 모자(母子)의 인연을 맺었다.
부모와 떨어져 2세 때부터 지방의 친할머니와 함께 살아온 박씨는 “친할머니에 대한 애틋한 정이 있었고 중학교 때 돌아가시면서 그리움이 더했다”며 “여 할머니를 처음 본 순간 내가 모셔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박씨는 여 할머니의 지병인 척추압박골절(척추를 지탱하는 물렁뼈가 주저앉는 질환)이 악화되자 95년 부모 집에서 나와 연수구 선학동 시영아파트 11평형 임대아파트에서 여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병이 악화되면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할머니의 대소변을 수년 동안 직접 받아 내는 등 친자식보다 더 극진하게 할머니를 모시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장가갈 시기를 놓쳐 그만 노총각 신세가 됐다.
그동안 서너 명의 여성과 선을 봤지만 “할머니가 있는데 내가 모셔야한다”는 조건을 내거는 바람에 퇴짜를 맞기도 했다.
여 할머니는 자신을 친부모처럼 돌보는 박씨에게 수치스러운 과거를 알리기 싫어 일본군 위안부 출신이란 사실을 숨겨왔다. 그러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회원들이 할머니를 방문하면서 위안부 출신이란 사실이 알려지게 됐다.
전남 고흥이 고향인 할머니는 17세 때 일본 경찰과 군인에 의해 납치돼 중국 톈진(天津)으로 끌려갔다. 4년간 일본군에 의해 모진 고통을 당한 그는 조선인 통역관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탈출했고 평양에서 살다가 광복을 맞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뒤 경찰관과 결혼했지만 자궁에 이상이 생겨 아이를 낳지 못했고 결혼 4년 만에 집에서 나와야 했다. 그리고 여동생이 있는 인천에 정착했다.
박씨는 “현재 친부모나 형제, 친구들조차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며 “주변에서 장가가라고 성화인데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할머니를 모시는데 어려워지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인천=차준호기자 run-ju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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