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매미’가 휩쓸고 간 이후 전기가 완전히 끊긴 경남 거제시. 6만6000여가구의 주민 18만4900여명은 마치 문명세계와 단절된 것 같은 상황에서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주민들은 “섭씨 30도를 육박하는 늦더위에 마실 물마저 없으니 전쟁터가 따로 없다”며 혀를 내둘렀다.
거제도는 15만4000kW급 송전 철탑 2기가 12일 오후 9시경 무너져 전기가 끊기면서 수돗물 공급마저 중단돼 극심한 불편을 겪고 있다.
‘암흑의 도시’로 변한 지 3일째인 14일 오후 7시경. 비교적 지대가 높은 신현읍 고현리 거제시청에서 바라본 시가지에는 땅거미가 내려앉았으나 가로등은커녕 주택과 상가의 불빛이 없어 도시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였다. 차량들만 가끔 오갈 뿐 유흥가도 쥐죽은 듯 조용했다.
거제시청 맞은편 거원빌라에 사는 한철호씨(50)는 “밤이면 거제 전역은 한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캄캄하다”며 “식사야 휴대용 가스레인지에 라면이라도 끓여 먹으면 되지만 화장실 쓰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고 말했다.
거제시내 상가와 식당 등이 대부분 문을 닫아 주민들은 생필품마저 구하기 힘들어졌다. 일부 상점만 주민들에게 양초 손전등 건전지 등 ‘생존 필수품’을 팔고 있었다. 거제시내 45개 주유소 가운데 일부는 발전기를 구해 13일부터 영업을 재개했지만 주유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충전을 하지 못한 주민들의 휴대전화는 무용지물이 된 지 오래다.
이날 오후 300가구가 입주해 있는 신현읍 양정고려3차아파트 앞 할인점에는 양초를 사러 온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할인점 점원은 “양초를 들여놓기 무섭게 동이 난다”고 말했다.
횟집과 식육점 등 상품의 신선도가 중요한 상가의 피해도 막심했다. 중앙재래시장의 신동아 횟집 김성관씨(50)는 “추석 대목을 위해 돌돔 도다리 볼락 등 값이 나가는 고기를 수족관에 잔뜩 넣어두었으나 정전으로 모두 죽었다”면서 “냉각기 모터 등 설비도 바닷물에 잠겼다”고 울상을 지었다.
인구 밀집지역인 장승포동과 옥포동은 물론 거제시에 속한 다른 섬 지역 주민들도 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전기와 수돗물이 바닥난 탓에 복구와 정리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이웃이나 관공서, 약수터 등으로 생활용수를 구하러 다니는 것이 주민들의 가장 중요한 일과가 됐다.
태풍으로 큰 피해가 난 것으로 알려진 조선관련 업체와 성내협동화 단지, 한내조선기자재 공단 등 거제지역 기업체들은 전기 공급이 언제 재개될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대우조선은 예정된 연휴가 끝났지만 15일 하루 더 쉬기로 했다. 삼성조선 관계자는 “휴무는 15일까지로 계획돼 있었지만 16일에도 전기가 공급되지 않을 경우 정상 가동에 차질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거제시 관계자는 “15일 오후 8시경부터 일반 가정에 제한 송전이 가능해지고, 산업용 전력은 빨라야 18일경 공급될 수 있을 것”이라며 “단전 단수 상태가 며칠 더 지속되면 어떤 부작용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말했다. 거제지역 학교도 전기가 들어올 때까지 휴교하기로 했다.
통영시도 마찬가지. 비진도와 매물도 추봉도 등 남해안 도서 지역은 어디 할 것 없이 단전에다 주택과 도로 등이 대파되고 생필품마저 떨어져 ‘고립무원’ 상태에 놓여 있다.
통영시 관계자는 “남해안 자치단체마다 수백억원대의 피해를 봤고 복구는 시작조차 하지 못했는데도 언론은 도시지역에만 관심을 갖는다”며 불평했다.
한편 부산 강서구 전역과 사하구 일부 지역 1만가구에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4만여명의 주민이 큰 불편을 겪고 있다.
또 경북 영양 울진 봉화군 등 산간지역 2000여가구에도 3일째 전기공급이 끊겨 주민들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도로가 유실된 곳이 많아 장비를 사용할 수 없어 복구 작업마저 힘든 실정이다.
거제=강정훈기자 manman@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