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관리 시스템의 부재가 재난을 더 키우고 있다. 태풍 ‘매미’와 같은 대형 재해가 해마다 발생하고 있으나 효율적인 정부 재난관리시스템이 없어 사전예방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해당 부처간에는 물론,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간에도 체계적인 재난관리시스템이 수립돼 있지 않아 요소요소에 ‘구멍’이 뚫린 지 오래다. 지방에는 비상연락망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곳이 비일비재하다.
정부는 15일 13개 부처가 나눠 맡고 있는 재해·재난 관련 업무를 ‘소방방재청’으로 일원화하겠다고 밝혔지만, 이는 올 2월 대구 지하철참사 때 나온 얘기다. 6개월 동안 지지부진하다가 대형 재해가 또 들이닥치자 부랴부랴 서두르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재난관리시스템의 현주소다.
▽‘따로 따로’ 재난관리시스템=정부의 재난관리시스템은 그동안 13개 부처가 업무를 나눠맡고 있었다. 이에 따라 올 초부터 업무의 일원화를 추진해왔으나 아직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올해부터 자연재해 및 인적 재난도 국가위기상황을 부를 수 있다는 취지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산하에 위기관리센터를 신설해 장기 재난관리계획을 짜왔다. 테러나 지하철사고 등 도시형 재난을 국가위기 차원에서 관리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자연재해 전문가도 없는 이 기구에 대형재난의 통합관리를 기대하기는 무리다.
또 정부는 중앙정부와 지방간의 협조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96년부터 수백억원을 들여 중앙재해대책본부를 중심으로 전국 주요 시·도·군·구 등에 재해안전관리망을 구축했다.
그러나 이 또한 태풍 ‘매미’로 단번에 ‘무용지물’임이 드러났다. 강풍으로 송전탑 등이 쓰러져 대규모 정전사태가 빚어지면서 각 지역 재해대책상황실 컴퓨터가 다운되자 ‘촛불’보다 못한 존재가 돼버린 것.
비상연락망의 부재도 문제다. 지난해 태풍 ‘루사’ 때 피해를 본 경북 영양군의 경우 올해도 태풍 ‘매미’로 3명이 숨졌다. 이웃 봉화군 역시 산사태가 발생해 일가족 3명이 참변을 당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즉각 관계당국에 보고되지 않았다. ‘현장(마을)→읍·면사무소→군→도→중앙정부’로의 피해 접수가 신속히 이뤄지지 못한 탓이다. 또 재난이 발생하더라도 복구예산은 다음해가 돼서야 집행할 수 있는 예산 시스템의 문제도 지적된 지 오래다.
▽재난업무 담당자가 없다=재해예방과 대처에서 손발격인 각 지방자치단체들의 방재직 공무원들이 인사 등에서 소외되고 있는 것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시·군 방재계에는 기술직 직원 2, 3명이 근무하는 게 고작. 따라서 사고 현장에 나가 상황 파악을 하기는커녕 전화로 상급 기관에 보고하기 바쁜 실정이다.
경북 영양군청 관계자는 “재난이 나면 엄청난 피해를 보는데도 방재분야는 한직 부서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하다”면서 “인력구조 개선 때 단골메뉴로 등장해온 게 방재직을 줄이는 것 아니었느냐”고 한탄했다.
▽시스템 시급히 정비해야=전문가들은 이번 기회에 재해관리 시스템을 전면 개편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대 방재안전관리센터 이길성(지구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 센터장은 “20여년 동안 줄기차게 시스템 개선을 주장해 왔지만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면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이 해마다 반복되고 있다”고 개탄했다.
환경운동연합 염형철(廉亨喆) 국장은 “8월 수해가 나면 다음해 3월에야 예산이 본격적으로 집행돼 복구작업이 시작되고, 결국 몇 달 뒤 또 수해를 입는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전문가들은 “‘선복구 후피해산정’으로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 김이호(金利鎬) 박사는 “똑같이 태풍이 관통한 일본이 별다른 피해를 보지 않은 것은 우리와 근본적으로 재난관리 시스템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며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헌진기자 mungchii@donga.com
전지원기자 podragon@donga.com
대구=이권효기자 boriam@donga.com
▼태풍피해 법적배상될까▼
초강력 태풍 ‘매미’에 따른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가운데 수재민들이 정부 보상금 외에 인명 및 재산피해에 대해 법적 배상을 받을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동안 건물주나 국가, 지방자치단체 등의 수해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입증된 경우 배상 판결을 받은 사례가 있기 때문에 이번 태풍 피해자들이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서울지법은 지난해 10월 집중호우로 인한 건물 침수로 지하층에서 익사한 김모씨 유족이 건물주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비상탈출구를 마련하지 않은 건물주의 책임을 물어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또 1984년 수해를 입은 서울 마포구 망원동 주민들이 서울시를 상대로 집단 소송을 벌여 승소했다. 3일 동안 334mm의 폭우가 쏟아지면서 서울시가 관리하던 망원동 유수지의 수문이 붕괴되자 1만여명의 피해 주민이 서울시를 상대로 소송을 내 7년간의 법정공방 끝에 53억8000여만원의 승소 판결을 받아낸 것.
그러나 당시 재판부는 하천이 넘쳐 발생한 피해 자체에 대해 배상판결을 내린 것이 아니라 수문의 하자로 발생한 과실사고라는 점을 인정했기 때문에 수재민의 손을 들어줬다.
관재(官災)의 경우 수재민이 공무원의 과실을 입증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승소가 쉽지 않다. 국가배상법 제5조는 ‘도로, 하천, 기타 영조물의 설치·관리에 하자 또는 공무원의 ‘명백한’ 과실이 있을 경우에만 배상이 인정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특히 이번 태풍의 경우 1959년 태풍 ‘사라’ 이후 가장 위력적이었다는 평가여서 국가나 지자체가 ‘천재지변에 따른 불가항력적 상황’임을 주장할 경우 수재민들이 이를 반박할 여지가 적다.
지난해 12월 서울지법은 2001년 폭우로 피해를 본 서울 관악구 신림동 주민 30여명이 서울시와 해당 구청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100년 만에 한 번 있을 법한 폭우였던 만큼 지자체의 책임이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서울고등법원의 한 판사는 “구체적으로 피해액을 입증할 수 있고 관리책임을 맡은 당국의 과실이 명백한 경우에만 배상을 받아낼 수 있다”며 “이번 태풍의 경우 천재지변의 성격이 커 입증에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김수경기자 sk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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