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나한테 무슨 일이…’라는 식의 시민들의 근거 없는 ‘안전 불감증’ 역시 문제다. 실례로 각종 대형 재난시 발생한 인명피해 중에는 구경을 나왔다가 참변을 당한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나라와 함께 태풍 ‘매미’가 휩쓸고 간 일본의 사망자가 1명에 그친 것도 재난관리 시스템뿐 아니라 재난관리 마인드에서 우리보다 훨씬 앞선 결과로 분석되고 있다.
완벽한 재난관리 시스템도 건실한 재난관리 마인드가 전제돼야 가능하다.
▽공무원부터 허둥지둥=각 지방자치단체 공무원은 재해 예방과 대처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번에도 부산과 마산의 극명하게 대비되는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일선 공무원들이 초동 대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의 생사가 갈린다.
그러나 공무원의 안일한 태도만을 비난할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우리에게는 주민은 물론이고 공무원들조차 재해 유형별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정리해 놓은 지침이나 매뉴얼이 없다. ‘중앙정부-광역지자체-기초지자체-읍·면·동사무소-현장’을 연결하는 개략적인 재난대피 지침서가 있지만 내용도 엉성하고 그나마 사문화된 지 오래다.
일선의 재난 대처훈련과 교육도 부실하기 짝이 없다. 주민과 함께 대피훈련을 하는 경우는 없고, 기껏 연1회 컴퓨터로 피해 집계와 대처요령을 ‘이론적으로’ 배우는 게 전부다.
경북도청의 한 공무원은 “이번처럼 큰 사고가 나면 그 당시는 방재, 방재 외치지만 평소의 방재업무는 전담요원이 없을 정도로 늘 곁가지”라며 “큰 사고가 나면 우리 공무원부터 당황해 어찌할 줄 모른다”고 털어놨다.
▽시민들의 ‘안전 불감증’=시민들 역시 스스로의 안전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식이 빈약하다. 1999년 유엔은 ‘자연재해 경감 10개년 계획’의 하나로 각국 대학생 1500명씩을 대상으로 안전의식을 조사했다.
‘비행기가 추락하고 있다면 무슨 생각이 들까’라는 질문에 대해 미국 학생들은 “안전띠를 맨 뒤 충격을 줄일 방법을 강구하겠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반면 한국 학생들은 절반 이상이 “설마, 나는 안 죽을 것”이라고 답했다.
연세대 사회환경시스템공학부 조원철(曺元喆) 교수는 “우리의 경우 재해 현장에서 주민들이 ‘죽어도 내가 죽으니 신경쓰지 말라’고 대피를 호소하는 공무원들에게 반발하는 사례가 많은데 이는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대책=전문가들은 유형별 재해 대처 프로그램 마련, 종합방재훈련과 교육을 통한 안전의식 고취, 방재직 공무원의 체계적 육성 등을 시급한 과제로 꼽았다.
국립방재연구소 심재현(沈在鉉) 박사는 “초등학교 교육 과정부터 안전의식을 갖도록 훈련하고, 주민들도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이벤트 형식의 안전의식 제고 프로그램을 갖추는 것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또 도로와 건물 교량 등의 일반 구조물은 물론 도시 설계 등 사회 전반에 방재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국토연구원 양지청(楊枝靑) 연구위원은 “이상기후로 인한 자연재해가 더 빈발할 것”이라며 “자연재해에 의한 피해규모를 최소화하고 인위적 재해 발생 확률을 감소시키는 개념이 사회 구석구석에 자리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진국 사례=일본은 지진이 빈번하게 발생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일반 시민들에 대한 방재교육을 일상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각 지자체는 수시로 주민들에게 안내문을 보내 비상시 대피할 경로와 장소를 주지시킨다. 평상시 전국 150여개의 안전체험관을 통해 재난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실질적 대처요령을 익힐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독일의 경우 연방정부부터 작은 마을에 이르기까지 10년 이상 방재업무만을 전담하는 전문가를 체계적으로 육성하고 있다. 또 방재네트워크를 통해 재해경보와 대책, 주민 대처요령 등을 실시간으로 전달해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미국은 천재지변까지도 사전에 대비해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 있다. 정부 예산에도 이 분야가 최대한 반영되고 있다.
이헌진기자 mungchii@donga.com
전지원기자 podragon@donga.com
대구=이권효기자 boriam@donga.com
▼다리끊긴 정선 5일째 고립▼
“전화 전기가 끊긴 채 고립됐던 사흘간은 한마디로 악몽이었습니다. 이제 겨우 전화와 전기가 들어왔으나 마을이 외부로부터 고립돼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16일 오후 유실된 마을 하천의 임시가교 설치 작업을 하다 전화를 받는다는 강원 정선군 임계면 반천1리 배문환 이장(41)은 “이제 겨우 놀랐던 가슴을 추스르고 복구 작업에 나서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배 이장은 “외부와의 단절감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 이렇게 임시가교 설치 작업에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반천1리는 이번 태풍으로 주택 5가구가 전파되고 10가구가 침수되는 큰 피해를 보았다. 그러나 더 큰 걱정은 마을로 들어오는 도로의 교량이 대부분 떠내려가 당분간 고립이 불가피하다는 것.
고랭지 채소와 감자 등 반출해야 할 농산물도 적지 않아 고립이 장기화할 경우 불편 못지않게 큰 경제적 타격마저 우려되고 있다.
정선군에서는 현재 정선읍을 비롯해 4개 읍면 271가구 694명의 주민이 5일째 고립돼 있다. 북면 봉정리(69가구 180명)도 마을 교량이 끊겨 고립됐고, 잠수교를 이용했던 북평면 문곡리(27가구 57명)도 교량 50m가 유실돼 고립됐다. 또 정선읍 가수리(86가구 270명)의 경우 동강이 범람하며 마을 진입도로가 침수되거나 유실됐다.
특히 반천1, 2리(20가구 40명)와 임계4리(24가구 50명), 고양리(45가구 97명) 등 산간 3개 마을은 장기적인 고립이 우려되고 있다.
다행히 14일부터 생필품 등이 헬기로 공수되고, 일부는 보트로 하천을 따라 쌀과 생필품 등이 공급되고 있으나 턱없이 부족한 상태다.
춘천=최창순기자 cschoi@donga.com
▼특별재해지역 선포되면▼
정부가 이르면 24일 태풍 ‘매미’로 인한 모든 피해 지역을 특별재해지역으로 선포키로 함에 따라 어떤 지원이 이뤄질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16일 본보 집계에 따르면 태풍에 따른 재산피해는 무려 2조7000억원이 넘는다. 이는 전국 일원에 대한 특별재해지역 선정 기준인 ‘피해규모 1조5000억원 이상’ 조건에 충족된다.
특별재해지역으로 선정되면 특별위로금과 함께 주택 농작물 농축산 부문에 대한 복구비용이 상향 지원되고, 이재민 본인 부담 중 일부가 국가 보조로 전환되는 등 무상지원금이 크게 늘어난다.
작년 태풍 ‘루사’ 때 특별재해지역으로 처음 선포된 전국 203개 시군구의 1917개 읍면동에 대한 국가와 지자체의 지원 명세를 보면 통상적인 재해지원금보다 50∼150%가량 많다.
먼저 세대주가 사망 또는 실종된 경우 가족에게 자연재해대책법에 규정된 보상금 1000만원에 특별위로금 1000만원을 추가한 2000만원을, 세대주 아닌 가족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경우에는 1000만원(보상금 500만원, 위로금 500만원)이 지급됐다.
주택 파손은 전파의 경우 일반재해는 융자액을 제외하고 1190만원(복구비 810만원, 위로금 380만원)이 나갔지만, 특별재해는 1796만원이 지급됐다. 반파는 일반재해가 634만원인 반면 특별재해는 938만원. 주택 침수에는 가구당 200만원(일반재해 120만원)이 위로금으로 나왔다.
농경지는 80% 이상 유실을 기준으로 ha당 일반재해(1025만원)보다 500만원이 많은 1573만원, 비닐하우스는 ha당 4228만원(일반재해 3026만원)이 지원됐다. 농작물도 일반작물이 ha당 157만원에서 314만원으로 100% 상향 지원됐다.
가축은 돼지 100마리를 기준으로 1334만원(일반재해는 925만원)이 나왔으며, 양식장은 ha당 795만원(일반재해는 483만원)이 지급됐다.
이와 관련, 행자부는 “올해는 일부 지원항목별로 지원기준 액수가 조금씩 상향 조정돼 작년보다 좀더 많은 돈이 지원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종훈기자 taylor55@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