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관리 시스템 구멍 뚫렸다

  • 입력 2003년 9월 29일 18시 13분


최근 수혈받은 60대 노인 2명이 에이즈에 감염된 데 이어 1997년부터 4년간 10여명이 수혈을 통해 말라리아에 감염된 사실(주간동아 10월 2일자 보도)이 밝혀져 혈액관리 시스템에 문제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혈액학 전문가들은 “에이즈를 조기 진단하는 첨단장비 도입도 중요하지만 무조건 피를 얻고 보자는 생각부터 고쳐 혈액관리를 양보다는 질적으로 전환하는 게 시급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피, 정말 모자라나=지난해 전국에서 252만1285명이 헌혈을 했다. 한번 헌혈할 때 빼는 피의 양은 400mL(17세 미만은 320mL). 어림잡아도 연간 8억mL 이상의 피가 공급됐다.

대한적십자사 혈액사업본부에 따르면 이 중 9%가 버려졌다. 버려진 피는 B형과 C형 간염, 에이즈, 매독 등에 양성반응을 보여 ‘부적격’ 판정을 받은 것이 절반 정도이다.

그러나 나머지는 보존 기한을 넘겼기 때문에 폐기됐다. 현재 적혈구는 35일, 혈소판은 5일까지 보관가능하며 혈장은 1년간 보관할 수 있다.

혈액사업본부 관계자는 “약품 제조용으로 사용되는 혈장은 여전히 부족하지만 혈소판, 적혈구 등 수혈용으로 쓰이는 혈액은 모자라지 않는 게 사실”이라고 밝혔다. ▽헌혈, 양보다는 질로 바꿔야=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성분채혈’을 통해 혈액 중 필요한 성분만 골라 얻는 추세. 혈소판의 경우 이들 국가에서는 필요량 전체를 성분채혈을 통해 공급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혈액 전체를 채혈하는 전혈(全血)채혈이 대부분이고 성분채혈을 통해 얻는 혈소판은 최대 25%에 불과하다. 그러다 보니 하나의 성분을 얻기 위해 혈액 전체를 빼야 하며 그만큼 혈액 낭비가 많은 것.

또 선진국에서는 건강한 피를 확보하기 위해 헌혈 자원자의 과거 병력이나 성적(性的) 취향 등을 문진(問診)을 통해 철저히 알아낸다. 따라서 성욕이 왕성한 20대 남성보다는 여성이나 50대 이상 중장년층, 고령자로부터 주로 헌혈을 받는다.

그러나 한국은 혈액 확보가 쉽다는 이유로 군대를 선호한다. 군대에서 얻는 혈액은 매년 공급량의 40%를 차지한다. 한 대학병원의 진단방사선과 교수는 “채혈 방식을 개선하지 않는 한 수혈 감염사고는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혈액기관, 문제없나=전문가들은 국내 혈액사업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대한적십자사 혈액사업본부가 전문성이 없다고 지적한다.

현재 이 기관은 산하에 중앙혈액원을 포함해 전국에 16개의 혈액원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직원 수는 1581명. 그러나 의사는 1% 정도인 20명에 불과하다. 연구원 또한 17명에 불과하며 그나마 중앙혈액원에 모두 몰려 있다.

혈액원에서 10년간 근무하다 퇴사한 의사 김모씨는 “쉽게 피를 구하고 대충 관리하면 된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다”고 털어놨다.이에 대해 연세대 의대 진단검사의학과 김현옥(金賢玉) 교수는 “무엇보다 혈액학을 전공한 전문의 등 의료진과 함께 과거 헌혈기록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전문인력 확보가 가장 시급하다”고 말했다. 한 전문가는 “대한적십자사의 혈액 독점이 가장 큰 원인”이라며 미국의 경우처럼 사설 혈액원을 적극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김상훈기자 core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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