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침략에 항거해 애국계몽운동을 벌이던 우국지사 나철(羅喆)이 김윤식(金允植) 등과 함께 단군교를 부활시킨 것이 1909년의 일이다. 그는 단군교를 대종교로 개명한 뒤 배달민족의 역사와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독립운동가 서일 조성한 이범석 김좌진 등도 모두 대종교도였으며 상하이임시정부 법무총장 신규식은 대종교를 국교로 할 것을 추진하기도 했다.
우리 민족사에서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인식은 몇 차례 변화를 거쳤다. 특히 고려 대몽항쟁기에 쓰인 ‘단군본기’가 신라 고구려 옥저 부여 예맥 등을 모두 단군의 자손으로 규정해 민족의 뿌리가 하나임을 강조한 것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이는 당시까지 고려 사람들의 의식 속에 이어져 오던 신라 고구려 백제의 유민의식을 떨치고 하나의 민족으로 단결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19세기 초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직면한 조선인들 사이에서 근대적 민족의식이 제기되면서 전래의 단군사상도 새롭게 인식됐다.
1905년 을사조약을 전후해 단군 숭배의 기운이 팽배한 가운데 창시된 대종교가 창교 2년 만에 2만여 교인을 포용한 교단으로 확장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바로 이 시기에 고조선사를 서술한 ‘단기고사’ ‘환단고기’, 그리고 대종교의 경전이라고 할 수 있는 ‘삼일신고’ 같은 책들이 나온 것이다.
이렇듯 단군사상은 민족공동체의 상징으로 이어져 왔다. 이제 단군사상은 남북한의 우리 동포들 사이에 살아 숨쉬는 민족의 소중한 유산으로 또 한번 거듭나야 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는 단군을 둘러싸고 상반된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하나는 단군상이 도처에서 훼손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단군을 높이기만 하면 애국이라는 소박한 단군숭배사상이다.
단기 4336년 개천절을 맞아 단군과 고조선사에 대한 적극적인 연구와 참여로 단군문화가 새롭게 정리되기를 기대한다.
김시우 독립기념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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