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불황속 ‘문화코드’를 찾아서…

  • 입력 2003년 10월 30일 16시 27분


요즘 같은 불황기, 사는 일이 고단할 때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듣고 읽으며 마음의 위안을 얻을까.

경제가 어려워지면 문화비 지출부터 줄이기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문화생활 자체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불황기에도 잘 나가는 대중 문화상품은 존재한다. 물론 잘 나가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2003년 10월, 경기침체에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은 TV 드라마 ‘대장금’을 보고 영화관에서 ‘황산벌’을 본다. 발라드 가수 성시경의 3집 음반을 사고 이수영의 ‘덩그러니’를 들으며 ‘설득의 심리학’ 혹은 ‘파파포포 투게더’를 읽기도 한다.

경기 변동에 따라 부침을 겪어온 대중문화의 프리즘으로 ‘불황의 문화심리지도’를 들여다봤다.

●책=따뜻하거나 소통을 돕거나

27일 오후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설득의 심리학’을 들춰보고 있던 회사원 장기원씨(42)에게 왜 이 책을 보고 있느냐고 물었다. “세상을 사는 데도 기술이 필요한 것 같아서”라는 게 그의 대답이었다. 남의 마음을 읽어 의사소통을 돕는 조언을 다룬 이 책은 요즘 서점가에서 경제경영부문 1위를 달리고 있다.

서점가에서는 또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는 은유(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나무’·종합 1위)나 희망을 향해 달려가는 젊은이들의 삶(‘파파포포 투게더’·비소설 부문 1위)이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불황의 그늘이 짙어지던 올 상반기, 교보문고가 집계한 베스트셀러 1위는 ‘야생초 편지’다. 외환위기 직전 경제가 곤두박질치기 시작한 97년의 1위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98년의 1위인 ‘산에는 꽃이 피네’와 같은 맥락의 책이다.

어려운 시절에는 따뜻하고 소박한 격려가 담긴 이야기들을 많이 찾는다는 얘기다.

그 대신 소설은 잘 읽지 않는다.

1997∼2003년 경제성장률과 연간 종합 베스트셀러 50위 안의 소설 비율은 반비례한다.<2면 그래프 1 참조>

그나마 잘 나가는 소설은 대부분 불륜을 소재로 한 것이 많다. 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분석을 제시했다.

“1929년 대공황 직후의 미국에서는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버블경제가 무너지는 90년대 일본에서는 ‘실락원’이 인기를 끌었다. 외환위기직후인 98년 한국의 베스트셀러 소설은 양귀자의 ‘모순’이다. 모두 불륜을 소재로 삼아 기존 도덕에 의문을 던지거나, 살아남는 것의 절박함을 표현한 소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한소장은 “반면 비소설 부문에서는 대공황기 미국에서는 ‘처세술의 대가’인 데일 카네기의 ‘친구를 얻고,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 90년대 불황기 일본에서는 긍정적 사고를 권하는 처세서 ‘뇌내혁명’이 인기였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 출판시장에서 두드러진 현상도 셀프 헬프(Self-help), 즉 자기관리서의 성장”이라고 분석했다.

자기관리서들에도 시대가 반영된다. 올해 상반기 경제경영부문에서는 ‘설득의 심리학’(3위)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6위) ‘The One Page Proposal’(7위) ‘대화의 기술’(8위) ‘협상의 법칙’(14위) ‘기획서 잘 쓰는 법’(19위)처럼 직장 문화의 변화 속에서 의사소통의 방법, 보고와 표현수단의 기술을 다룬 책들이 많이 팔렸다.


●TV=어떻게든 함께 살아남아라

맞벌이 여성 박윤주씨(37)는 ‘그대 그리고 나’이후 드라마를 제대로 챙겨본 적이 없지만 요즘은 ‘대장금’의 열렬한 팬이 됐다.

“장금이 미각을 잃는 결정적 장애 앞에서도 ‘너는 된다’며 무조건 믿어주는 한상궁, 절대 포기하지 않는 장금의 악착같음”이 그를 TV 앞에 앉혀놓았다. 그는 “지금처럼 뭔가 희망이 필요한 시기가 아니었다면 그냥 ‘재미있는 건전 드라마’로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꼭 박씨만 그런 게 아니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사람들은 TV를 더 많이 본다.<그래프 2>

TV 프로그램 중에서도 오락프로와 드라마, 생활정보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높아지는 반면, 뉴스 시청률은 하락한다. 시청률 조사전문기관인 TNS 미디어의 전국 집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오락프로 시청률은 9.3%로 지난해 상반기(8.8%)보다 높았다.

또 다른 시청률 조사전문기관 닐슨 미디어가 집계한 지난 주 ‘전국 시청률 톱 10’가운데 드라마는 6편. ‘대장금’(1위)과 ‘장희빈’(2위)을 제외하면 모두 가족 드라마들이다.

MBC ‘회전목마’(4위)는 살아남으려 안간힘을 쓰는 언니와 운명에 순응하는 동생의 이야기이고 SBS ‘완전한 사랑’(7위)은 외도와 불륜 대신 주부의 눈물겨운 가족사랑과 헌신을 다뤘다. MBC ‘백조의 호수’(8위), KBS ‘백만송이의 장미’(9위)등 일일 드라마 두 편도 결혼을 소재로 삼거나 부모의 재혼으로 가족이 된 두 형제가 화합하는 이야기이다.

가족 드라마의 인기가 말해주듯, 어려운 시기에는 해체와 떠남, 반목과 고뇌보다 결합과 안정, 함께 공존하기와 살아남기를 그린 드라마들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얻는다. 98년에 드라마 시청률 1∼3위를 기록한 ‘그대 그리고 나’ ‘보고 또 보고’ ‘정 때문에’도 모두 밝은 톤의 가족 드라마들이었다.

‘모래시계’ ‘대망’등의 김종학 PD는 “만약 ‘모래시계’가 호황이었던 95년이 아니라 외환위기 때 방송됐더라면 그 같은 신드롬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실 속의 고뇌가 산적해있는 상황에서는 시청자들이 TV에서까지 무거운 주제나 인물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대중음악=달콤쌉싸름한 위안

댄스곡이 한풀 꺾이고 발라드가 인기를 끄는 것도 경제난을 보여준다. <그래프 3>

음반판매 순위를 집계하는 한터정보시스템에 따르면 현재 음반 판매 1위는 발라드 가수 성시경의 3집, 2위도 소울 발라드인 브라운 아이드 소울 1집이다. 98년 가장 많이 팔린 음반은 김종환의 발라드 앨범 ‘사랑을 위하여’로 11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반면 댄스 음악 뿐 아니라 록도 경기가 어려울 때 침체하는 장르다. 97년 하반기부터 ‘록은 죽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정통 록이 급속하게 가라앉았으며 지난해 월드컵의 영향을 받은 ‘윤도현 밴드’의 열풍을 제외하곤 여전히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음반시장이 경기변동의 영향을 민감하게 받는다고 단정하긴 어렵다. 음악평론가 강헌씨는 “발라드는 패션의 ‘화이트 앤 블랙’같은 클래식이라 유행을 타지 않으며 한국에서 비주류인 록은 불황일 때 가장 먼저 퇴출되고 호황일 때도 가장 늦게 불을 지피는 장르”라고 설명했다.

음악평론가 임진모씨도 “70년대 말 미국 경제가 호황일 때 디스코 음악이 폭발적 인기를 누렸듯, 경기가 넉넉할 땐 댄스, 록 음악이 유행하고 경기가 어려울 때에는 마음을 위로해줄 수 있는 선율음악, 멜로디 음악이 좀 더 유리한 경향은 있다”면서도 “한국 음반산업은 경제활동의 주체인 20,30대가 아니라 10대의 용돈문화라 경기변동의 영향을 그리 크게 받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영화=판타지로의 도피

지난 주말 영화 흥행 1∼3위는 ‘황산벌’ ‘위대한 유산’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등 모두 한국영화다. 한국영화는 경기변동과 무관하게 급속한 성장세를 타고 있다. <그래프 4>

불황에 영화가 잘된다는 것은 국가를 불문하고 상식이다. 사람들은 극장에서 함께 판타지를 즐기는 집단적 제의(祭儀)를 통해 잠깐이나마 어려움을 잊는다. 미국에서 ‘할리우드의 황금기’는 대공황 직후인 1930년대였으며 일본에서도 하향세를 걷던 영화산업이 회복되기 시작한 것은 거품 경제가 붕괴된 1992년 이후였다.

1997, 98년에 각각 흥행 1위를 차지한 영화는 ‘편지’와 ‘약속’. 경기가 극도로 어려웠던 당시 울고 싶은 사람 뺨 때려주듯 최루성 멜로들이 인기였다. 요즘의 특이한 점은 TV의 사극 열풍과 맞물려 영화관에서도 ‘스캔들’ ‘황산벌’등 사극 열풍이 분다는 것.

영화평론가 겸 임상심리학자 심영섭씨는 “과거라는 이름의 마법이 점점 강해지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신과를 찾는 환자들도 현실이 어려워지면 의식이 시간적으로 더 먼 곳으로 달아나는 경향이 있다는 것. 그는 “영화 ‘친구’이후 80년대의 복고가 유행하다가 이젠 그보다 더 먼 과거인 사극이 유행한다는 것은 향수와 복고조차 위안이 되지 않는 시점에 이르렀다는 반증이 아닐까”라고 해석했다.

글=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

사진=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그래픽=정인성기자 71j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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