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보다 앞서 가는 사교육 ▼
자녀의 대학입시를 겪어 본 학부모라면 누구나 수능 점수의 위력을 실감한다. 대학입시 안내 책자가 두꺼운 책 한 권이 될 만큼 복잡해 보여도 명문대에 합격하는 ‘비결’은 단순하다. 수능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이다. 학교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도 수능 성적이 잘 나오면 명문대를 노릴 수 있지만 수능 점수가 부족해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입시생들은 ‘수능 고득점’을 ‘인생역전’으로 부른다.
김대중 전 정부가 추진한 ‘교육개혁’의 핵심이 바로 수능 위주의 입시방식을 개선하겠다는 것이었다. 대학입시에서 내신비중을 높이고 특기자 선발을 확대하는 등 여러 대안들이 도입됐다. 그러나 별 효과는 없었다. 내신비중을 높이자 일선 고교는 ‘내신 부풀리기’로 맞서 100점 만점자를 양산했다. 특기자를 우대하기로 하자 각종 경시대회가 범람해 ‘진짜’ ‘가짜’를 구분하기 어려워졌고 봉사활동은 학생 대신 부모의 몫이 됐다. 대학들은 다시 수능점수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가장 믿을 만하다는 수능이 우수학생을 가려내는 데 과연 유용한지에 대해서도 면밀히 따져보아야 한다. 요즘 학원가에는 수능 문제를 예측할 수 있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돈다. 수능의 출제위원들이 누구인지 수소문해 알아낸 뒤 그들의 전공이나 성향을 분석하면 출제방향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족집게 학원이다. 올해의 경우 119명으로 구성된 수능 출제위원의 명단을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대로라면 수능도 사교육의 ‘사정권’ 내로 들어선 것으로 보아야 한다.
1994학년도에 시작된 수능은 주입식 암기식 사교육으로는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없도록 출제한다는 게 대원칙이다. 비싼 돈을 주고 과외를 받는다고 점수가 더 오르지도 않으며 사고력 판단력 문제해결능력 등 ‘평소 실력’이 드러나도록 출제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수능인 SAT가 그렇고 프랑스의 바칼로레아가 이런 식이다.
미국의 SAT 출제당국은 어릴 적부터 독서를 많이 하고 사고력이 뛰어난 학생들이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프랑스의 바칼로레아에는 논술시험이 포함되어 있는데 해마다 시험에 어떤 주제가 제시되는가가 전국적인 관심사다. 그동안 출제됐던 문제를 보면 ‘사랑이 의무일 수 있는가’ ‘여론이 정권을 이끌 수 있는가’ 같은 것들이다. 이런 시험을 한국식 ‘학원 강의’나 ‘고액 과외’로 따라잡을 수는 없다.
교육문제에 관한 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우리 현실에서 수능이 대학입시의 일차적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면 차선책은 수능이 과외의 표적이 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사교육비 지출을 최소화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 이것이다. 하지만 최근 사교육시장은 엄청난 자금력을 바탕으로 수능을 앞서 가고 있다. 학원들이 올해 수능의 언어영역에서 지문 4개를 예측해 낸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연 2회로 늘려야 ▼
수능 체제에 대대적인 혁신이 필요하다. 내년부터 수능이 7차 교육과정 체제로 전환되는 것을 계기로 리모델링을 모색해야 한다. 학원의 주입식 교육으로는 따라잡기 힘든 새로운 문제 형식을 개발하고 출제시스템도 개선해야 한다.
수능의 과열은 1년에 한 번만 치르는 탓이 크다. 단 한 번의 시험으로 초중고교까지의 실력을 평가받고 인생까지 결정짓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교육당국은 수능 횟수를 늘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입장이지만 이는 수험생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다. 자기네 편의만 생각하는 게 교육당국의 본 모습인가. 최소한 1년에 2번에 걸쳐 수능을 실시함으로써 학생들에게 보다 많은 기회를 주어야 한다. 수능 연 2회 실시와 특수목적고 설치 확대는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공약이기도 하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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