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녕/노동운동, 순수해야 아름답다

  • 입력 2003년 11월 12일 18시 26분


손해배상과 가압류란 용어가 요즘 부쩍 관심을 끌고 있다. 화염병이 쏟아지는 거리집회에서도, 파업현장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손해배상이나 가압류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말이지만 노동계의 ‘구호’로 등장하면서 새삼 그 의미를 되새겨 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민주노총이 이 문제를 이슈로 들고 나온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사용자의 손해배상청구와 가압류로 노조활동이 위축되고 조합원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리려는 것이다.

사정을 듣고 보면 딱한 측면도 있다. 노조 간부는 물론이고 조합원과 신원보증인의 월급, 퇴직금, 승용차, 아파트, 심지어 선산까지도 가압류 당한 경우가 있다고 한다.

사용자의 노조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와 가압류는 김대중 정부 당시 특히 많았다. 당시 정부는 불법파업 사업장에 대한 경찰력 투입을 억제했고 사용자들은 자구책 차원에서 법적인 대응을 한 것이다. 노동계는 이를 ‘신종 노동탄압’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현재 46개 사업장에 1353억원의 손해배상소송과 가압류가 걸려 있다고 주장한다.

노동계는 사용자에 의한 손해배상청구와 가압류의 ‘남용’을 법으로 막아 달라고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폭력과 파괴행위를 수반한 쟁의행위의 직접피해에 대해서만 손해배상 책임을 묻고 그것도 노조 간부나 조합원, 신원보증인이 아닌 노조에 한정해야 한다는 게 핵심 요구사항이다.

사용자들의 얘기도 절박하다. 손해배상청구와 가압류는 법에 의해 부여된 정당한 권리이며 불법쟁의로 인한 재산상의 손해를 구제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법적 장치라는 것이다. 이를 막으면 무슨 수로 기업을 꾸려 갈 수 있느냐는 항변이다.

사실 선진국에서도 불법파업에 대해 손해배상청구를 제한하거나 특례를 인정한 사례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 문제를 전향적으로 해결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심지어 법무 행자 노동 3개 부처 장관이 직접 나서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몇 가지 개선방안까지 약속했다. 현재 실무선에서 구체적인 연구가 진행 중이다.

사법부도 최근 가압류가 지나치게 채권자에게 유리하게 이뤄져 왔다는 점을 인식하고 보다 엄격하게 심리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아 가고 있다.

민주노총이 사용자의 손해배상청구와 가압류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끌고 정부의 대책 마련을 촉구하기 위해 집단행동에 나선 것이라면 이미 상당한 성공을 거둔 셈이다. 실제적인 대책이 나오려면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이기 때문에 그때까지 기다리고 지켜보는 게 마땅하다.

그런데도 민주노총이 집단행동을 멈추지 않고 계속 거리집회와 파업으로 치닫고 있는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갈수록 나라살림이 어려워지고 있는 이때에, 국민을 불안케 하면서 계속 정부를 압박해 더 얻어낼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혹시 손해배상청구나 가압류와 관련한 대책 요구는 명분일 뿐 내년 총선을 앞두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도록 ‘정부 길들이기’를 하려는 것은 아닌가.

만에 하나 그런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다면 빨리 접는 게 좋을 것이다. 노동운동은 순수해야 아름답고 또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사가 다 그렇듯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노동운동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이진녕 사회2부장 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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