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씨가 밝힌 ‘500억원가량’은 검찰수사와 언론보도를 통해 이미 알려진 구문(舊聞)이다.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이라 ‘고백’의 밀도가 약해 보이고 국민에게 주는 감동도 그만큼 적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 유감스럽다. 10월 말 SK비자금 사건이 터져 사과했을 때 다른 기업의 경우까지 미리 파악해 밝혔더라면 같은 사안으로 두 번씩이나 사과해야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씨는 97년 대선 때도 국세청을 동원해 불법 대선자금을 조달한 ‘세풍’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바 있다. 그렇다면 작년 대선 때는 측근들이 두 번 다시 불법자금 수수에 관여하는 일이 없도록 엄중히 단속해야 했다. ‘세풍’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것이 오늘의 비극을 부른 게 아닌가.
이제 이씨가 할 일은 분명하다. 말뿐이 아닌 행동으로 검찰수사에 적극 협조하는 것이다. 또 ‘모든 것은 내 책임’이라며 주변 인물에 대한 관용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검찰수사에 협조하도록 독려해야 한다. 그것이 두 번의 대선에서 ‘1000만표’를 받은 다수당 총재이자 유력한 대선후보였던 ‘국가원로’로서의 도리일 것이다.
한나라당도 이씨의 뜻이 훼손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당장 검찰의 소환 요구를 받고도 잠적 중인 당직자들을 출두시키고 당 차원에서 밝힐 것이 있으면 밝혀야 한다. 모든 책임을 이씨측에 떠넘기려는 듯한 자세를 보여선 안 된다. 이씨의 사과는 정경유착의 고질적 관행을 청산하는 중요한 계기가 돼야 한다. 그래야만 사과의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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