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대한항공 추락사건' 의혹 불씨 지핀 현준희씨

  • 입력 2003년 12월 21일 18시 43분


현준희씨가 18일 기자와 만나 대한항공 858기 폭발사건에 대한 국제사회의 의혹 어린 시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 사건은 아사히신문이 발행한 ‘20세기 주요 사건 화보집’에서 1987년의 최대 사건으로 꼽혔다. -이훈구기자
현준희씨가 18일 기자와 만나 대한항공 858기 폭발사건에 대한 국제사회의 의혹 어린 시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 사건은 아사히신문이 발행한 ‘20세기 주요 사건 화보집’에서 1987년의 최대 사건으로 꼽혔다. -이훈구기자
지금으로부터 16년 전의 대통령선거 직전 발생한 대한항공(KAL) 858기 추락사건. ‘북파공작원 김현희 폭발테러사건’으로 각인된 이 사건이 최근 재조명되고 있다. 사건 자체가 ‘국가안전기획부 공작에 의한 조작’이라는 풍문이 등장하더니 천주교 사제 200여명과 희생자 가족들이 진상 재규명을 촉구하고 나섰다. 방송사들은 각종 특집 프로그램을 내놓았거나 준비 중이다.

이런 움직임에 불씨를 지핀 이가 전 감사원 직원 현준희(玄俊熙·50)씨다. 그는 2001년 잡지 ‘내외저널’ 창간호에 ‘대한항공 폭파사건의 12가지 의혹’이란 글을 기고했다. 이 사건을 ‘김정일 지시에 의한 테러’로 단정케 했던 두 가지 결정적 증거가 사실은 대단히 취약하다는 게 그의 주장. 즉, 어린 시절 사진과 현재의 귀 모양이 다르다는 데서 알 수 있듯 김현희 자백의 상당수가 허위이고, 사고기 잔해에서 화약 잔재 등 폭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안기부 수사발표의 잘못을 100가지나 지적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시 수사는 졸속이었습니다. 국가정보원은 지금도 김현희 관련 증거는 400여점이나 보관하고 있으면서도 사고기 잔해는 행방조차 묘연합니다.”

평범한 감사원 직원이던 그가 왜 이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걸까.

“사건이 터졌을 때 저는 일본에서 6개월 연수 중이었습니다. 일본에서도 이는 큰 뉴스였지요. 바로 전날 159명의 승객을 태운 남아프리카공화국 비행기가 모리셔스 북방에서 추락해 47명의 일본인이 숨진 데 이어 마유미라는 일본 여성이 관여된 추락사건이 다시 터졌으니까요.”

자연스럽게 두 사건을 비교하던 그는 의문을 갖게 된다. 남아공기의 추락사건은 10개국 국민이 희생됐기 때문에 국제적 조사가 벌어졌다. 수심 4000m가 넘는 깊은 바다에서도 추락기의 잔해와 블랙박스를 건져냈다. 그러나 한국인만 탑승한 대한항공기 사건은 수심 40m도 안되는 바다에서 잔해는 물론 유품 한점도 찾지 못했다. 유일하게 남았다는 꼬리날개 부분의 잔해도 2년반 뒤에 발견된 것. 또 남아공기의 경우 탑승자 가족을 사흘 만에 현장에 급파했으나 대한항공기의 경우는 해를 넘겨서야 ‘허가’해 줬다. 일본 언론들이 ‘노태우 후보 대통령 당선 확실’이라고 보도하는 것도 거슬렸다.

92년 다시 일본에서 2년간 유학할 기회를 얻은 그는 개인적으로 이 사건에 대해 일본 언론들이 보도한 각종 자료를 본격 수집하고 정리했다. 그러나 발표할 용기는 내지 못하던 중 감사원을 그만둔 한참 뒤인 2001년 이를 발표키로 결심을 했다.

“당시 보수단체들은 김정일의 답방을 반대하면서 KAL기 폭발테러에 대한 책임을 내세웠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나부터 그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증되지 않은 일로 단죄하는 것이라면 남북 모두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 사건이 이제 더 이상 과거사가 아니라 미래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용기를 냈습니다.”

2001년 김정일을 서울지검에 고소하는 등 반(反)김정일의 선봉에 섰던 희생자 가족회가 그의 글을 계기로 오히려 정부측에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슬픈 사건’입니다. 사고기 탑승자들은 대부분 힘없고 돈 없는 근로자들이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유력인사들이었다면 현장조사를 그처럼 건성으로 해치우고 유품 하나 찾아주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조작설 등 당시 사건의 실체에 대한 의문에 대해서는 “오직 사실이 말하게 하라”면서 추측을 일절 배제했다.

“저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의문을 제기했을 뿐입니다. 이제 정부가 답할 차례입니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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