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저녁마다 찾아드는 남대문 지하통. 헐벗고 굶주리고 학대받는 그들에게는 둘도 없는 보금자리. ‘X마스’를 축하하는 천국(?)의 풍정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언제나 다름없이 쓸쓸한 그들의 삶은 저녁만이 안식을 주는 것이었지만 이날따라 유난히 소란했고 지붕 위를 내닫는 자동차 ‘엔진’ 소리가 심야의 고요를 깨뜨리고 천둥처럼 고막을 찢었기에 단잠을 채 이루지 못한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는 노래소리까지도 ‘싸탄’이 울부짖는 소리로만 들려왔을 뿐.
<동아일보 1953년 12월 26일자에서>
▼성탄절 화려함속에 ‘빈곤’은 여전▼
1953년은 성탄절이 한국인의 생활풍습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기 시작한 원년(元年)이었다. 일제강점기 기독교인들의 기념일에 불과하던 성탄절이 광복 직후 미군정과 6·25전쟁 등을 거치며 사실상 우리 사회의 최대 명절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게 된 것.
이 무렵 한국인치고 3년여에 걸친 전쟁의 참화를 떨쳐버리고 싶다는 절실한 심정을 갖지 않은 이 있었을까. 거기에 우리의 최대 우방으로 부상한 미국의 명절은 아주 편리한 계기를 제공했다.
국내 신문에는 관련기사가 폭주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민에게 성탄메시지를 보냈다거나 미군이 보육원에 성금을 전달했다는 등의 내용이다.
그러나 대중에게 이식(移植)된 ‘미국풍’의 성탄절은 외피뿐이었던 것 같다. 가족과 함께 하는 내용은 거의 없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뒤 경건함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게 그저 춤추고 노는 게 ‘우리의 성탄절’이었다. 댄스 풍경도 그중 하나다. 서양 춤은 ‘미8군 쇼’를 통해 본격 확산됐고, 서울 수복 후 명동과 소공동에는 댄스홀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위 기사는 전후(戰後)의 첫 성탄절 밤, 서울 남대문 지하도에선 집 없는 사람들이 노숙하는 가운데 다른 한편에선 화려한 댄스파티가 벌어진 세태를 대비해 보여준다. 새로운 명절 풍습에 대한 이질감과 소외감이 물씬 묻어난다.
지금 우리의 성탄절은 반세기 전의 그것과 얼마나 다른가.
서영아기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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