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우리가 유난을 떨었다고? 천만에, 인간들이 우리의 실체를 이제야 알아챘을 뿐이지.
사스가 바이러스의 베일을 한 꺼풀 벗겨내는 데 큰 기여를 했어. 그동안 인간들은 새가 죽으면 농약을 잘못 먹었겠지 하며 지나쳐 버렸어. 그런데 사스와 조류독감 등이 잇따라 발생하자 관심을 가진 거야. 왜 저들이 죽었지? 혹시 바이러스 질환이 아닐까 하고 말이야.
우리의 몸집은 보통 200nm(1nm=10억분의 1m)를 넘지 않아. 그러나 작은 고추가 맵다는 것은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일 거야. 돌연변이에 능해 우리더러 감염의학자들은 천의 얼굴을 가졌다고 하지.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라고 떠드는 걸 보면 정말 가소로워. 우리가 지구상에 처음 나타나기도 했지만 핵폭발이 일어난다 해도 살아남을 생물은 우리뿐이거든.
우리의 생명력은 정말 대단하지. 영하 수십도에서도 미래의 번식을 기약하며 긴 잠을 자지. 냉동 보관한 두창(천연두) 바이러스는 30년 뒤 해동했을 때 쉽게 살아났어. 1918년 스페인독감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70년간 알래스카의 동토에 묻혔던 시체의 폐 조직에 붙어 생존했어.
사스 바이러스는 인간의 대변에서 2일, 소변에서 1일, 플라스틱 위에서 2일 이상 생존할 수 있어. 기댈 숙주 없이 공기 중에 붕붕 떠 다녀도 1∼2시간은 거뜬히 살 수 있지.
인간들은 우리를 세균과 혼동하는 것 같아. 물론 끊임없이 돌연변이를 일으킨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구석이 있지만 사실 우린 완전히 다른 존재야. 세균은 몸집도 우리보다 크고 핵을 가지고 있어 숙주 없이 생존과 번식이 가능해. 항생제가 세균을 어느 정도 무력화시키지만 우리에게는 전혀 듣지 않지. 인간이 바이러스를 상대하기가 힘든 이유야.
사실 우리는 인류와 같이 살고 싶어. 인간도 그것을 부정하지 말아야 해. 성병 또는 입술 주위에 염증을 일으키는 헤르페스 바이러스 같은 친구는 인간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치지 않고 공존하지. 다른 바이러스들이 인간을 공격하는 것은 아직 서로 적응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야.
그런데도 마치 우리가 침투만 하면 모든 인간이 픽픽 쓰러진다고 생각한다면 정말 억울해. 예를 들어볼까. 치명적인 바이러스라 해도 1만명에게 침투했을 때 보통 1000명에서만 증세가 나타나며 이 중 100명이 입원할 정도지. 죽는 사람은 10명 정도에 불과해.
영원한 우리의 ‘짱’인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대해 말해 볼까. 인플루엔자는 17, 18세기 무렵 탄생했지. 1918년 스페인 독감은 전 세계적으로 2500만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어. 아직 인간은 돌연변이가 주특기인 인플루엔자를 못 잡고 있지.
인플루엔자는 헤마글루틴(H)과 뉴라미니다제(N)란 항원의 종류에 따라 수십종으로 나눠지는데 그동안 H는 15가지, N은 9가지가 인간에게 발견됐어. 항원의 조합에 따라 수백종이 존재하지만 인간에게 가장 흔한 H3N2를 비롯해 30여종이 흔한 편이지.
인플루엔자의 고향은 조류의 창자야. 인플루엔자는 그곳에서 숙주인 조류를 공격하지 않고 평화로운 생활을 했지. 그러나 인간으로, 다른 조류로 옮기면 파괴력을 발휘하지.
겨울철새들은 중국 남부와 홍콩을 거쳐 남하하며 오리와 닭 등 가금류에 인플루엔자의 분신을 전파하고 가금류는 다시 인간의 세포구조와 비슷한 돼지로 바이러스를 옮기지. 이 바이러스가 돼지의 몸에서 인간의 바이러스와 유전자 재조합 과정을 거쳐 새로운 형태의 바이러스를 만들어 내면 비로소 ‘대변이’가 이뤄지는 거야. 인간은 이를 두고 ‘슈퍼 독감’ 또는 ‘살인 독감’이라고 부르더군.
한때 에이즈 바이러스가 인플루엔자에게 대결을 신청했다가 무릎을 꿇었지. 건전한 성생활과 혈액 관리로 에이즈는 예방이 가능하지만 독감은 전염성이 강한 데다 아무리 청결한 사람도 피하기가 힘들기 때문이야. 당분간 인플루엔자를 누를 수 있는 바이러스는 나타나지 않을 거야.
김상훈기자 core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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