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등의 교수인 학자들은 철학, 역사, 사회, 법·정치, 경제, 국제관계 등 6개 분과에 걸쳐 지난해 3월부터 10개월간 여러 차례의 토론을 거쳐 50여개의 핵심주제를 뽑고 각 주제에 대한 강의안을 만들어왔다. 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올 한 해 동안 강연과 대담, 역사유적지 및 문화현장에서의 토론 등을 통해 청소년과 일반시민이 함께 참여하는 새로운 형태의 민주시민교육의 장을 열어갈 예정이다.
이 프로그램은 또 10, 20대 젊은이들과 40, 50대 학자들이 우리의 현실을 반성하고 문제를 풀어나갈 방향을 함께 모색하는 ‘만남의 장’이 되기도 할 것이다. 젊은이들은 학자들로부터 차세대 민주 리더가 되기 위해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지식이나 사상을 흡수할 수 있고, 또 학자들은 오늘날 젊은이들의 방황과 고민을 이해할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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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일 교수=지난 한 해 갈등과 대립이 무척 심했습니다. 2002년 대통령선거를 계기로 인터넷 세대가 사회 문제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386세대가 정권의 주체로 등장하기도 했지요. 민주화가 빠르게 진행됐지만 그 과정에서 이익집단들의 목소리가 커져 사회적 갈등과 혼란도 심각했습니다. 이는 결국 우리의 사고(思考) 혼란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고의 혼란은 철학의 부족에서 비롯되는 것이죠. 중세적 질서가 무너진 후 지난 200∼300년간 사람들은 공동체와 개인이 어떤 경우에 함께 발전할 수 있는가에 대해 지혜를 축적해 왔습니다. 이것을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체계적으로 알려줘야 해요. 무엇보다도 개인의 자유와 창의가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 그러나 공동체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그와 동시에 이뤄져야 사회가 발전한다는 사실의 공유가 중요합니다.
이제 대대적인 철학운동, 사상운동, 재교육운동이 필요한 때입니다. 특히 장차 한국사회를 이끌어갈 청소년에 대한 교육이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안민포럼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이 ‘젊은 리더를 위한 민주시민 강좌’를 준비했습니다.
▽고승철 부국장=동아일보에서 이 프로그램에 관심을 갖는 이유 역시 청소년의 지식이 편협해지고 어느 한 쪽의 이념에 치우치는 현실을 좌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청소년뿐 아니라 한국사회의 시민들이 균형 잡힌 시민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심각한 문제예요. 교육시스템에 책임을 돌릴 수도 있겠지만, 언론 또한 사회 계도의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암울했던 1930년대에 동아일보가 한국사회를 계몽하기 위해 펼쳤던 브나로드(V Narod)운동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이 사업을 진행하려 합니다.
▽권희정 교사=‘계몽’이란 방식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신문이 계몽의 주체가 되고 청소년은 계몽의 대상이 된다는 것인데, 청소년은 그렇게 피동적인 가르침의 대상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요즘 청소년은 사이버 세계에서 자신들의 ‘독립국가’를 형성하고 있어요. 예전처럼 어른이 될 때까지 어른들의 그늘에서 참고 기다려야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죠. 사이버 공간에서의 활동이 곧 현실의 힘이 된다는 것을 그 다음 날이면 바로 확인합니다. 청소년들끼리 사이버 세계에서 ‘얼짱’ 투표를 몇 번 했더니 거의 모든 신문에서 관심을 갖고 보도해 주지 않았습니까.
▽김상준 교수=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청소년이 기성세대의 ‘시민성’에 깊은 불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대체로 청소년이 보는 기성세대의 모습은 사욕을 추구할 뿐 공공적 가치에는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성세대에 대한 청소년들의 냉소는 불가피해요.
계몽사상가 루소는 자신의 책 ‘에밀’에서 15∼20세의 시기를 ‘제2의 탄생’이라고 부르는데, 이때 중요한 것이 ‘사회의 발견’ ‘타인의 발견’입니다. 인간의 자연성과 감수성이 이 시기에 이르러 공동체의 타인에 대한 공감으로 풍요로워지면서 시민으로 거듭 태어나게 된다는 뜻이죠.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갈등 양상을 보면 자기이익만 있지 타인에 대한 고려나 공감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진정한 시민이 없는 것이죠. 청소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 구성원에게 ‘제2의 탄생’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요.
▽박 교수=교육 없이는 역사의 계승도, 새로운 역사의 창조도 없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교육을 하려면 우선 기성세대가 스스로 모범을 보여줘야 해요. 감동 없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죠.
▽고 부국장=선진국에서는 석학들이 학문의 눈높이를 낮춰 일반시민 강좌를 많이 열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석학들이 고등교육기관인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대중들을 위해 강연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깁니다. 2000년에 366일간(2월이 29일까지 있었음) 석학들이 열었던 대중강좌인 ‘네오 아카데미아’는 큰 성황을 이뤘지요. 본보가 안민포럼과 함께 이 사업을 펼치는 것도 각 분야 전문가들이 청소년을 위해 마련한 프로그램을 신문지면을 통해 소개함으로써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민주시민 강좌로 확산시키겠다는 뜻에서입니다.
▽김 교수=이 시민 강좌에서는 주입식이 아니라 ‘함께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가르치는 사람 스스로가 자신의 고뇌와 경험을 청소년과 나눌 때 배우는 사람들이 감화되죠. ‘좋은 시민이 된다는 것’이란 제목으로 프랑스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발간한 시민교육 책자가 생각나는군요. 이 책은 시민이 되기 위한 방법 또는 덕목을 15개의 주제로 간략하지만 깊이 있게 다루었는데 그 주제는 ‘선택한다는 것’, ‘수락한다는 것’, ‘거절한다는 것’, ‘지켜야 한다는 것’, ‘관용한다는 것’, ‘불의에 저항한다는 것’, ‘참여한다는 것’ 등이었어요.
▽고 부국장=우리에게도 그런 책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우리의 교육현장은 직업교육과 충효사상에 치우쳐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민주주의의 의무와 권리 중 부담스러운 의무는 회피하고 권리 주장에만 치우친 감이 있습니다. 또 최근 교육 분야에서 진보적 성향이 과도하게 나타나면서 자유주의나 시장경제체제의 합리성에 대한 교육이 약화되는 측면이 있어요.
▽권 교사=이전에는 이념 편향이 문제였다면 요즘 청소년은 문제의식 자체가 없다는 것이 시민으로서의 자기인식을 갖는 데 더 큰 걸림돌입니다. 크든 작든 자기가 소속된 공동체에 대한 연대감이 없기 때문이지요. 개인의 이익이 침해 받을 때 항의하며 나서는 것은 납득하지만, 공익이 침해될 때 개인이 나서는 것은 ‘유별난’ 일로 여기죠. 이런 태도는 청소년들이 진로를 선택할 때도 너나없이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보다 개인의 이익을 중심으로 결정하는 현상으로 나타나요.
▽박 교수=민주주의 사회에서 대립과 갈등이 없을 수 없겠지만 공동선의 입장에서 이를 수렴하는 통합기능이 있어야 합니다. 이에 대한 교육이 우리 사회에서 대단히 미약해요. 김 교수께서 ‘제2의 탄생’을 이야기했는데 우리 사회야말로 권위주의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공생공영(共生共榮)의 민주시민사회로 ‘제2의 탄생’을 해야 할 때입니다.
▽고 부국장=이 사업이 새로운 차원의 민주시민사회를 여는 데 작은 불씨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정리=김형찬기자 khc@donga.com
▼안민(安民)정책포럼은▼
안민(安民)정책포럼박세일 서울대 교수, 장오현 동국대 교수(현 회장) 등이 주도해 2000년 출범한 실천적인 지식인 단체. 대학교수를 비롯해 연구원 공무원 금융인 의사 등 200여명의 회원을 두고 있다. 개인의 존엄과 창의를 존중하되 개인의 자유가 공동체의 이익에 우선할 수 없다는 ‘공동체적 자유주의’가 이념적 지표다. 사회적 현안에 대해 구체적 비판을 제기하며 한국사회에서 개인과 공동체가 함께 조화와 번영을 이룰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좌담 참석자▼
▽박세일(56)·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법경제학·안민포럼 기획위원장
▽김상준(44)·경희대 NGO대학원 교수·사회학
▽권희정(32)·상명사대 부속여고 철학담당 교사
▽고승철(50)·동아일보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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