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눈이 내리던 17일 오전 강원 원주시 봉산동 원주평생교육정보관 3층. 그림책 작가 이상희씨(43)가 온돌식 삼락회사무실에서 취학 전 어린이 15명에게 둘러싸여 우크라이나 민화 그림책 ‘장갑’을 읽어주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숲 속에 떨어뜨린 장갑 한 짝에 숲 속 동물들이 하나하나 추위를 피해 들어갈 때마다 아이들은 숨을 죽인 채 장갑이 터지지 않을까 작은 가슴을 두근거렸다.
“터졌다!”
“안 보여요.”
큰 아이들은 이씨가 책장을 넘기는 틈을 타 한마디씩 했고 그림책을 가까이서 보려는 아이들이 무릎걸음으로 이씨에게 다가가자 뒤에 앉은 작은 아이들은 그림이 보이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이씨는 아이들 한마디 한마디에 대답하며 같은 그림책을 네 번이나 읽어 내려갔다. “이따 대엽이만 따로 보여줄게.”
이씨가 지난해 6월부터 매주 토요일 오전 열고 있는 ‘그림책 버스’ 시간. 아이들은 집에서 엄마 아빠가 읽어주는 것도 즐겁지만 다른 아이들과 함께 ‘그림책 선생님’에게 듣는 것이 신나는지 매주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찾아온다. 이날 아이들은 이씨에게 다음시간에 숲 속 동물들이 살 집 그림을 그려오겠다고 약속했다.
이씨의 그림책 읽기는 밋밋하다고 할 정도로 구연동화와는 다르다. “구연동화가 아이들의 귀에 실감나게 다가오지만 상상력을 제한한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아이들은 그림책 속 각각의 인물들을 나름대로 상상하면서 글과 그림에 집중하지요. 읽기 전 책의 배경이나 작가에 대해 얘기해줌으로써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요.”
이정년씨(34·원주시 명륜동)는 “같은 책이라도 제가 읽어줄 때와는 다섯 살짜리 딸아이의 반응이 다르다”며 “뱃속의 아이도 새롭게 듣도록 토요일마다 이곳에 온다”고 말했다. 같은 영화라도 혼자 비디오를 볼 때와 영화관에서 볼 때 느낌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라고.
‘그림책 버스’는 아이들이 책을 많이 읽고 엄마들은 내 아이 뿐 아니라 우리 아이들에게 책을 가까이하게 돕도록 하기 위한 ‘작은 도서관 운동’이다. 이씨가 ‘그림책 버스’에 참가한 아이의 엄마들을 중심으로 ‘그림책 교실’을 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림책 교실’은 매주 수요일 오전 같은 장소에서 열리는데 회원 12명이 그림책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이화숙씨(35·원주시 태장동)는 “글을 써 본 지 오래돼 처음엔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회원들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아 네 살짜리 아이와 그림책을 만들어보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회원은 원주시민뿐만 아니다. 이경선씨(32·횡성군 횡성읍 읍하리)는 “여기서 배워 횡성지역에서도 도서관을 잘 꾸려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림책 교실’ 회장 오미혜씨(33)는 “온라인 서점이 많아지고 대형서점을 찾아볼 수 없는 지방에서 도서관은 아이들이 새롭고 재미있는 책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 소개했다. ‘그림책 교실’ 회원들은 한결같이 “지역 어머니들이 문화예술에 대한 갈증이 심하며 작은 계기라도 마련된다면 적극적으로 지역문화운동에 참여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이상희씨는 이들과 함께 ‘어린이들이 그림책에 몰입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으로 실제 ‘그림책 버스’를 만들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원주시민의 발이 돼 열심히 달리다 멈춘 버스를 태창운수로부터 기증받기로 했어요. 다양한 그림책을 비치해 그림책 버스로 꾸며 5월 5일 어린이날 원주시내 토지문학공원에 가져다 놓으려고요. ‘그림책 교실’ 어머니들은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할 겁니다. 원주지역 어린이들은 ‘그림책 버스’ 안에서 보고 들었던 그림책들을 유년시절의 추억 속에 깊이 간직하겠지요.”
원주=김진경기자 kjk9@donga.com
▼부천 '그림책 버스 뚜뚜'가 버스도서관 1호▼
‘그림책 버스’는 강원 원주지역 어머니 그림책 교실(http://cafe.daum.net/dianthus)이 토지문학공원에 추진 중인 ‘패랭이꽃 그림책버스’가 처음이 아니다. 화요일 오후 2∼5시 경기 부천시 원미구 중앙공원에 가면 ‘그림책 버스 뚜뚜’(http://cafe.daum.net/ddoddobus)를 볼 수 있다.
이 ‘그림책 버스 뚜뚜’가 그림책 기획자 조준영씨가 지난해 9월부터 그림책 작가들과 함께 운영하고 있는 ‘버스도서관’ 1호. 10년 전 동네주부들과 ‘가정도서관’을 만든 조씨는 이사할 때마다 도서관을 새로 만들어야하는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해 움직이는 도서관을 생각해냈고 2000여만원을 들여 버스를 사들였다.
조씨는 아예 ‘버스도서관 만들기 운동’을 벌이고 있는데 이 운동은 폐차된 버스를 재활용해 공원이나 마을에 세워 어린이도서관으로 만들자는 것이 취지다. ‘그림책 버스 뚜뚜’는 일반 버스를 개조해 만든 것이지만 폐차 버스를 이용하면 값이 저렴해 곳곳에 많이 세울 수 있다는 것. 이런 점에서는 ‘패랭이꽃 그림책버스’가 폐차를 이용한 ‘버스도서관’ 1호가 되는 것이다.
‘그림책 버스 뚜뚜’는 화요일 오후에는 부천 중앙공원에서 아이들을 맞지만 다른 날에는 고아원이나 각종 행사장을 찾아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다. 3월부터는 탈북어린이를 찾아가 책도 읽어주고 슬라이드동화도 상영할 예정이다.
김진경기자 kjk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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