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광표/첨단에 밀린 '신교육 요람'

  • 입력 2004년 1월 30일 18시 08분


“신문화의 발상지요 신교육의 요람인 정동골 배재학당 터에 최첨단 빌딩이 들어선 것을 축하하고….”

29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정동 배재학당 터에선 지하 4층, 지상 12층짜리 배재정동빌딩 2개 동의 준공식과 축하예배가 열렸다. 학교법인 배재학당 관계자와 참가자들은 1885년 개교 이래 119년 만에 이곳이 크게 발전한 것을 축하했다.

새 빌딩 바로 앞엔 배재학당 터임을 보여주는 옛 배재학당 동관(東館) 건물이 있다. 1916년 건축된 국내 최초의 서양식 학교 건물로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높아 서울시기념물 16호로 지정된 문화재다.

그러나 동관 건물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창의 유리는 깨지고 창에 붙여 놓은 바람막이 비닐도 여기저기 찢겨나가 보기 흉했다. 건물 벽엔 각종 전선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판자로 만든 것 같은 가건물이 벽에 붙어 있었다. 공사장 먼지가 날아온 탓에 건물은 온통 먼지투성이였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나무계단과 바닥은 흙과 담배꽁초, 쓰레기로 가득했다. 마치 철거 중인 건물처럼 황폐했다. ‘이것이 과연 서울시 지정 문화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건물의 관리주체는 소유주인 학교법인 배재학당이지만 감독관청인 서울 중구청에도 역시 관리책임이 있다.

동관의 사정이 이런데도 이날 행사가 열리는 동안 배재학교 동문들 사이에서도 동관에 관한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눈길을 주는 사람조차 거의 없었다. 모두들 새로 지은 건물에만 관심을 보일 뿐이었다.

행사가 열린 1시간반 동안 이 건물에 다가가 본 사람은 수백명의 참가자 가운데 불과 5명. 그중 1명이 이렇게 말했다.

“전엔 몰랐는데 빌딩이 두 채나 들어서니 동관이 좀 초라해 보이네.”

그러나 동관을 더욱 초라하게 만든 것은 역사에 대한 무관심이다. 이 건물이 없다면 이곳이 ‘신문화의 발상지요 신교육의 요람’이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동관 유리창의 찢어진 비닐조각이 바람에 펄럭이는 모습을 보면서 기자의 가슴은 황량하기만 했다.

이광표 사회2부 기자kpi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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