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운 심정을 하소연하고자 몇 자 올립니다. 시베리아 동북지역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불원천리 대한민국을 찾아왔습니다. 시베리아는 겨울이면 온통 동토로 변해 먹이를 구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간 대한민국은 저희에게 동장군의 ‘횡포’로부터 피난처를 제공해 주는 고마운 곳이었습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생명을 이어갈 양식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었지요. 그런데 요즘은 예전 같지 않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겨울 논에는 적잖은 낟알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바로 이 낙곡(落穀)이 저희에겐 귀중한 양식입니다. 막 추수가 끝난 1m²의 논에는 평균 730개의 낟알이 떨어져 있지요. 우리 쇠기러기는 하루에 약 450Cal의 열량이 필요합니다. 이 열량을 얻기 위해선 약 4500개의 낟알을 먹어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그런 양식이 논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낟알이 지난겨울에 비해 10분의 1로 줄었습니다. 추수 뒤 남은 볏짚을 둘둘 말아서 처리하는 바람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가축사료 등 다른 용도로 이용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희에겐 심각한 타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부는 지난 5년 동안 논에 무기질을 공급하라며 농가에 약 1200억원을 지원했답니다. 만약 이 예산 일부를 논에 짚을 썰어 넣도록 장려하는 데 사용했더라면 토양도 건실해지고 철새들에게도 기아의 고통을 주지 않았을 거란 생각을 해 봅니다. 논의 건강, 나아가 식량의 질과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화학비료나 석회가루보다 짚이나 철새들의 배설물이 더 좋다는 것은 상식 아닌가요?
충분한 보은은 아니겠지만, 철새들도 배설물을 논에 남겨 토양 개선에 일익을 하는 게 사실입니다. 하여튼 볏짚을 거두는 방식의 변화가 철새들에게는 엄청난 재앙입니다. 그저 선처를 바랄 뿐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곤혹스러운 것은 저희에 대한 사람들의 횡포에 가까운 무지입니다. ‘철새 정치인’이니 ‘조류독감’이니 하는 말이 언론에 오르내릴 때는 굶주림보다 더 고통스럽습니다. 옛사람들은 “기러기는 신예절지(信禮節智)의 덕(德)이 있다”고 했습니다. 암수가 의가 좋은 동물로 표상하여 전통혼례에서 목안(木雁)을 전하는 의식도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신의 없고’ ‘절개 없는’ 정치인을 어찌 ‘철새 정치인’이라고 하십니까?
이보다 더 당혹스러운 횡포는 ‘조류독감’이란 단어의 무분별한 사용입니다. 법정용어인데다 국제용어이기도 한 ‘가금인플루엔자’를 놔두고 어쩌자고 ‘조류독감’ 운운해 마치 우리가 ‘가금인플루엔자’ 전파의 원흉인 양 오해를 불러일으키는지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철새 몇 마리 잡아 혈청검사를 해 보니 바이러스가 발견됐다며 저희를 백안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철새들은 오히려 피해자입니다. 불결하고 좁은 공간에서 마치 공산품처럼 키우는 닭과 오리를 자연산 조류와 동일시하는 것은 무지일 뿐입니다. 비록 피난 와서 굶주리는 처지이지만 철새들을 모독하지 마십시오. 부탁입니다.
갑신년 겨울 쇠기러기 올림
노영대 한국자연정보연구원장
약력
1951년생. 고려대 화학과 졸업. 1996년 일간지 기자 생활을 접고 자연다큐멘터리 제작자로 나섰다. 한국자연정보연구원장, DMZ생태학교장, 문화재전문위원 등 자연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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