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모곡제' 놓고 民-軍 갈등

  • 입력 2004년 2월 15일 19시 22분


“지금이 조선시대냐.” “워낙 오래된 관습이라서….”

마을 이장(里長)에게 주민들이 돈이나 곡식을 주는 모곡(耗穀)을 개선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지난달 정부가 이·통장의 월 수당을 100% 인상키로 한 이후 더 거세지고 있다.

▽뿌리 깊은 모곡제=이장은 최소 행정단위인 마을의 대표자. 읍면의 업무를 보조하고 주민과 행정기관을 연결하면서 여러 가지 일을 맡고 있다.

자치단체의 조례에 규정된 이장의 수당은 월 10만원선. 올해 정부의 방침에 따라 월 20만원으로 인상됐다. 이밖에 영농회의에 참석하면 2만원 안팎의 수당을 받는다.

모곡은 이장에게 주민들이 곡식을 모아 주던 관습. 조선시대 자연부락에서 마을 대표자인 존위(尊位)에게 마을 공동의 논에서 생산된 쌀을 제공하던 것이 뿌리다.

지금도 모곡은 전국 3만6000여개 마을의 80%가량에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1년에 두 번 거두는 모곡은 곡식 대신 현금으로 바뀌어 한 번에 7000원∼3만원으로 다양하다. 마을의 가구 수에 따라 모곡 액수가 연 800만원에서 25만원까지 천차만별이다.

▽준조세 모곡제=농어촌 주민들은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돈으로 모곡을 거두는 것은 맞지 않다”며 불평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농촌공동체와는 달리 지금은 이장을 자치단체장이 임명하고 읍면장의 업무를 보조하는 준공무원인데도 이장 수고비를 주민이 부담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경북 청도군의 홈페이지에는 모곡을 둘러싸고 주민들의 불만이 이어지고 있다. 주민들은 “돈 1∼2만원이 아깝다기보다는 주민세 재산세 같은 세금을 꼬박꼬박 내고 있는데 모곡이라는 이상한 세금을 정기적으로 내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도시에서 농어촌으로 이사 오는 주민에게 모곡은 낯설다. 대구에서 경북 의성으로 이사 온 주부 조모씨(43)는 “1년에 4만원씩 꼬박꼬박 모곡을 내지만 황당하다”며 “도시에는 없는데 농촌에 산다는 이유로 모곡을 내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군청에 따졌다.

이에 대해 의성군은 “법적 근거는 없지만 오랫동안 주민 자율적으로 시행돼온 것이라 자치단체에서 일률적으로 제재하기는 어렵다”고 답했다.

▽국가 부담으로 전환 필요=이장 수당은 자치단체가 부담하므로 모곡 부분은 국가가 흡수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지적이다. 농어촌 인구가 줄어들고 고령화되는 데다 마을별 가구 수도 들쭉날쭉해 정부 차원에서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모곡제를 연구한 경북 안동시청 김현승(金鉉昇) 사무관은 “공무를 담당하는 이장의 보수를 지자체가 모두 부담하는 것은 어렵다”며 “이장 수당의 현실화 차원에서 모곡 부분(전국적으로 연간 500억원선)은 국가가 부담하는 게 바람직하다”며 “마을별 가구 수도 10가구에서 200가구 이상으로 천차만별이므로 소규모 마을은 통폐합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이장들도 모곡의 개선을 바라고 있다. 농어촌의 생활환경이 바뀌면서 모곡을 거두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경북 이통장연합회 박태길(朴泰吉·52·경북 성주군) 회장은 “이장은 마을을 위해 봉사한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모곡에 의존하는 측면이 있다”며 “이장은 국가 행정의 말초신경인 만큼 정부와 지자체가 이장의 역할에 대해 인식을 새롭게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대구=이권효기자 bor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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