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실험의 생명공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사람과 같은 영장류에서도 줄기세포를 만들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또 일반 배아 줄기세포의 결함을 극복할 수 있어 퇴행성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세포 치료 요법의 문을 열었다. 환자 자신의 체세포에서 배아 줄기세포를 만들 수 있어 면역거부반응을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계도 있다. 이번 실험은 여자의 체세포와 난자를 결합한 것이다. 남자라면 이렇게 좋은 결과가 안 나왔을 것이다. 남자의 체세포와 여자의 (핵이 제거된) 난자는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이번 기술이 언제쯤 실용화될 수 있을 것으로 보나.
“임상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건너야 할 관문이 많다. 10년은 지나야 가능할 것이다.”
―앞으로 계획은….
“1년 동안 복제 실험을 중단하겠다. 당분간은 이 기술이 사회적으로나 정책적으로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지켜볼 생각이다. 우선 내년에 생명윤리법이 발효되면 정부에 연구 허용 여부를 타진할 생각이다. 정부가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 이를 기다리겠다.”
―정부가 연구를 허용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관련 기술을 외국에 이전해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하겠다. 이미 지진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줄기세포를 대량으로 배양해 세 곳에 분산 배치해 뒀다.”
―비결이 무엇인가. 이론보다는 기술이 더 중요한 것도 같은데….
“한국인 특유의 손재주다. 오직 한국인만이 쇠젓가락으로 콩자반을 자유자재로 집을 수 있지 않는가. 구시대적 이야기 같지만 ‘헝그리 정신’도 성공 비결이다. 우리 실험실은 세 가지 요일이 없다.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이다. 창의성도 필요하다. 기존 이론을 적용해 한없이 시행착오만 되풀이할 수는 없다. 개인적으로는 새벽마다 40분씩 단전호흡을 한다. 벌써 19년째다. 이를 통해 영감을 얻곤 했다. 명색이 과학자인데 다소 비(非)과학적인 얘기로 들릴 것 같지만….(웃음)”
―이번 성과를 묵혀 둔다는 것은 그리 좋은 결정이 아니라는 시각도 있을 텐데….
“줄기세포는 엄청난 가치가 있다. 따라서 미국 피츠버그대의 제럴드 섀튼 교수,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로저 피터슨 교수, 독일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한스 쉘러 박사 등과 국제 공동 연구를 하기로 잠정 합의를 했다. 하지만 공동 연구도 한국 정부에 정식으로 보고한 뒤에 시작하겠다.”
―이미 종교계를 비롯해 윤리적 문제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특히 실험 과정에서 16명의 여성이 제공한 242개의 난자에서 30개의 배반포기를 얻었지만 줄기세포는 한 곳에서만 추출된 것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논란은 지속될 것으로 보이는데….
“처음부터 난자 입수 경로와 방법에 대해 비판을 받을 각오로 실험에 착수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난자를 제공했다. 미국 현지에서 한 여성은 친척이 난치병 환자라면서 치료를 위해 자신의 난자를 제공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번 실험에서는 호르몬제를 써서 과배란을 유도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부작용은 없었다.”
―만약 이번 연구 성과가 인간 복제에 적용된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 기술은 인간 복제의 설계도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 기술을 적용해 인간을 만들 수 있는 과학자는 세계적으로 10명도 안 된다. 제도적인 제한도 고려해볼 만하다. 나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사례를 따르라고 설득하고 있다. 인간 복제를 법으로 금지하고 통제하라는 것이다. 또 이번 실험 결과가 치료용 복제의 허용 여부에 관한 논란을 증폭시킬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연구의 전면 금지보다는 그 결과를 선용(善用)하도록 하는 의견이 늘어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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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 과정에서 제일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
“세 가지가 어려웠다. 우선 난자에서 핵을 뽑는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소나 돼지의 난자와 사람의 난자는 아주 다르다. 전자(前者)가 탄탄한 축구공이라면 후자(後者)는 찐득한 풀이 묻어 있는 풍선이다. 축구공은 대충 다뤄도 터지지 않는다. 하지만 찐득한 풀로 뒤덮인 풍선은 핵 분리용 유리관에 달라붙거나 아예 터져버린다. 난자에서 핵을 분리할 수 있는 기술이 노하우다.
둘째는 세포 융합을 유도하는 방법이다. 체세포의 핵을 난자에 이식하기 위해서는 전기 자극과 화학물질 투입이 필요하다. 이때 관건은 화학물질을 언제 넣느냐이다.
셋째는 인큐베이터에서 난자를 기르는 문제다. 어떤 배양액을 이용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린다. 현재 이 세 가지 기술을 모두 특허 출원했다.”
―스카우트 제의는 없었나.
“많았다. 하지만 나는 대한민국 사람이다. 어려워도 우리 실험실을 떠나지 않겠다. 이 때문에 정부가 연구를 허용하지 않겠다면 내가 옮기는 게 아니라 기술을 이전하겠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감회나 소회를 말해 달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교민이 울먹이며 전화를 해 왔다. 이렇게 자랑스러웠던 적이 없다고 했다. 대한민국 국민임이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한국에 도착한 다음날부터는 ‘이런 일은 나에게 없었다’라고 생각할 작정이다. 실험실의 한 사람으로 돌아가 연구를 더 해야 한다. 국민이 나를 잊어주기를 바란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우리는 미국의 심장부에서 2010년쯤 예견됐던 생명공학기술의 고지(高地) 위에 태극기를 꽂고 돌아가는 길이다.’
김훈기동아사이언스기자 wolfkim@donga.com
고기정기자 koh@donga.com
▼황우석 교수는 누구인가▼
‘누런 소(黃牛)’. 황우석 교수가 자신의 이름에서 두 글자를 따서 붙인 별명이다.
황 교수의 일생은 이 별명처럼 소와의 각별한 인연 속에서 진행돼 왔다.
1999년 2월 복제소 ‘영롱이’를 탄생시켜 일약 스타 과학자로 떠올랐다. 이번 연구 성과도 소의 난자로 수 없이 행한 ‘실전(實戰) 경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충청도 벽촌의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시절 방과 후는 소에게 꼴을 먹이며 지냈다. 이때부터 ‘소에 대한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선생님은 성적이 뛰어났던 그에게 의대에 진학하라고 권했다. 하지만 황 교수는 1, 2, 3지망 모두 수의학과로 써놓았다.
1982년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그의 꿈이 이루어지는 듯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시련이 찾아왔다. 원래 서울대에 교수로 채용될 예정이었지만 임용을 둘러싼 갈등으로 졸지에 실업자가 된 것.
하지만 이 ‘위기’는 오늘의 황 교수를 만든 ‘기회’로 작용했다. 평범한 수의사의 길을 갈까 망설이던 그에게 1984년 일본 홋카이도대에서 연구원으로 오라는 제의가 왔다. 일본에서 황 교수는 인공수정을 비롯한 다양한 가축번식 관련 기술을 손에 익혔다. 또 외국 논문을 통해 동물복제가 조만간 현실화될 수 있다는 ‘감’을 잡았다.
1986년 서울대 교수가 된 뒤 그는 꿈을 하나씩 실현시켜 나갔다.
황 교수의 기상시간은 오전 4시30분. 1시간 정도 호흡과 명상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실험은 오전 7시부터 시작된다. 쉬는 날은 없다. 제자들도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다. 매일 오전 5시30분이면 도축장으로 달려가 수백개의 ‘신선한’ 난소를 가져온다.
황 교수는 “우리의 손재주가 뛰어난 것은 난자를 공짜로 대량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며 “연구원들이 마음껏 실험할 수 있는 재료가 있고 쉴 새 없이 연구하는데 누가 따라올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김훈기 동아사이언스기자 wolfkim@donga.com
▼황우석교수 약력▼
1953년 충남 부여 출생
1977년 서울대 수의학과 졸업
1982년 서울대 임상수의학 박사
1984∼85년 일본 홋카이도대 객원연구원
1986년∼현재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
2000년 홍조근정훈장, 국회과학기술상 수상
2001년 세종문화상 대통령상 수상
2001년∼현재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
2002년 제1회 닮고 싶고 되고 싶은 과학기술인 선정
(동아일보, 한국과학문화재단 주최)
2003년∼현재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
논문 190편, 저서 17편, 특허 국내 4건, 국외 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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