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비 경감대책]<中>'수준별 수업' 인프라 갖춰졌나

  • 입력 2004년 2월 19일 18시 51분


“실력이 제각각인 아이들을 한 교실에 모아놓고 가르치려면 정말 숨이 막힙니다. 누구한테 초점을 맞춰야 할지도 모르겠고….”

서울 K고 이모 교사(40)는 초임 교사 시절부터 느낀 이 같은 좌절감이 수업에 대한 열정을 식히는 원인이 됐다고 털어놨다.

교육 전문가들은 교육인적자원부의 사교육비 경감 대책 가운데 가장 시급한 것이 수준별 수업의 정착이라고 강조한다. 학교에서 수준별 수업만 제대로 이뤄진다면 수업의 질이 높아져 사교육 수요가 크게 줄어들 수 있다는 것.

하지만 개학을 앞둔 학교들은 막막하기만 하다는 표정이다. 수준별 이동수업을 위한 교사와 교실이 부족하고 수준별 교재나 평가 기준도 없기 때문이다.

▽미비한 교육여건=교육부는 우선 중학교 1학년∼고교 1학년의 수학 영어 교과의 수준별 이동수업을 현재 20%에서 2007년까지 50%로 늘리는 등 단계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교육부는 교과 선택 확대와 수준별 수업을 중시하는 제7차 교육과정에 대비하기 위해 교사 수를 늘리고 있다. 현재 수준별 이동수업에 필요한 전국 초중고교의 교실 수가 90% 정도 갖춰졌다고 교육부는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학생 수 감소로 교실이 남아도는 읍면 지역 학교까지 포함한 통계일 뿐이다. 도시지역 학교의 교실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또 2003년 기준으로 전국 초중고교 교사는 29만1242명으로 법정 정원(32만9081명)에도 크게 못 미친다.

▽교사의 적극적 참여가 관건=서울 Y고 이모 교감(46)은 “수준별 수업은 교사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며 “교사들이 사명감을 갖고 협조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학생 수준에 맞는 다양한 수업을 하려면 교사의 수업 준비 부담이 커진다. 수준에 따라 가르칠 교재를 개발해야 하는 것도 교사의 몫이다. 각기 다른 교육을 받은 학생들에 대한 내신 성적을 산출하려면 시험 문제와 평가 방식도 크게 바뀌어야 한다.

1994년 수준별 수업을 도입해 정착시킨 서울 성심여고의 이경석 교사(44·영어)는 “처음에는 예전보다 서너 배의 시간과 노력이 든다며 불만을 터뜨리는 교사도 있었지만 결국 아이들을 잘 가르쳐야 한다는 교사의 본분을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 교원 단체들이 수준별 수업에 대한 참여 거부 등을 검토하고 있어 교사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 내는 것은 학교별 과제로 남게 됐다.

▽학생 학부모 이해해야=서울 K고는 지난해 영어 수학 과목의 수준별 이동수업을 도입했다가 결국 실패했다. 학생과 학부모가 이를 우열반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한양대 정진곤 교수(교육학)는 “수준별 수업은 모든 학생의 학력을 높이기 위한 방안이라는 취지를 학부모와 학생이 받아들여야 교육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 성심여고의 수준별 수업은 교장을 비롯한 전체 교사가 애정과 열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학부모와 학생들이 이해하고 수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학교 2학년 김승희양은 “학력 수준이 낮은 반에 편성된 친구들이 ‘처음에는 창피했지만 수업을 따라잡을 수 있어 다시 공부에 흥미를 갖게 된다’고 말한다”고 전했다.

홍성철기자 sungchul@donga.com

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전조교 사교육대책 반발▼

교육인적자원부의 사교육비 경감대책에 대해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한국교원노동조합 등 양대 교원노조가 반발하고 나섰다. 또 교육관련 시민단체들도 각각 찬성 또는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등 이 정책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전교조는 19일 서울 영등포구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사교육비 경감대책은 학교를 입시학원으로 만드는 발상”이라며 “사교육비의 근본 원인인 대학 서열화와 입시경쟁을 간과한 학교교육의 학원화 대책이다”고 주장했다.

전교조는 △국공립대 평준화 △수능 자격고사화 △현행 근무평정제도 폐지 △폭력 교사 등 부적격교원퇴출장치 마련 △학교 구성원에 의한 학교평가체제 마련 등을 촉구했다.

전교조 송원재 대변인은 “정부가 일방적으로 이 대책을 실행할 경우 교사들에게 보충수업을 거부하도록 권고하는 것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교조는 “대부분의 정책이 대학입시에 맞춰져 있어 교육부가 학벌주의를 조장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또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교육개혁시민운동연대, 학벌 없는 사회 등은 “이 정책은 입시 위주 교육의 근본 문제를 외면한 미봉책”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인간교육실현학부모연대, 학교를 사랑하는 학부모 모임 등은 “사교육비 부담을 덜어주고 공교육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방안”이라며 “학교가 이번 대책을 효과적으로 실천하도록 학부모들도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교육부 이수일(李修一) 교육정책실장은 “이 대책을 원하지 않는 학교에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교사 학생 학부모의 여론을 최대한 수렴해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전경련 교육개혁 시급-제안▼

전국경제인연합회는 한국의 글로벌 경쟁력 확보를 위해 교육개혁이 시급하다며 자립형 사학 활성화, 협약학교 도입 등을 통해 고등학교 평준화체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전경련 이규황(李圭煌) 전무는 19일 전경련 교육개혁특위와 한국개발연구원(KDI)이 함께 마련한 ‘중등교육 개혁 실천방안 설명회’를 갖고 개혁방안을 제시했다.

전경련은 지금의 자립형 사립학교와 자율학교는 소득이 높은 계층의 극히 우수한 소수 학생만을 수용할 수 있다며 새로운 학교제도인 협약학교 도입을 통해 고등학교간에 경쟁체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협약학교는 학교 운영자가 교육당국과 학생선발, 교원, 교육과정, 학사운영 등에 대해 포괄적인 협약을 맺은 뒤 운영하는 학교. 등록금은 공립과 같은 수준이며 정부보조금도 받지만 학교측이 학교 운영에 관한 포괄적인 자율권을 갖는다. 학생들은 학교 선택권을 갖는다.

학생이 선호하는 학교는 학생 수도 늘리고 정부 보조금을 더욱 많이 받아 규모를 더욱 키워갈 수 있다. 그렇지 못한 학교는 폐교의 위협에 직면하게 돼 학교간에 경쟁이 유도된다는 것이 전경련의 설명.

그러나 자원자가 많을 경우 성적과 같은 차별적인 기준으로 선발할 수 없도록 해 평준화의 기본골격은 유지해야 한다는 것.

전경련은 또 전국의 모든 고등학교에 대해 협약학교 제도를 실시하고 협약학교가 교육당국과 대등한 관계에서 계약을 맺고 이 계약의 범위 내에서 학교를 운영할 수 있도록 관련법령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경련은 아울러 자립형 고등학교를 확대할 수 있도록 지정요건을 완화하고 납입금에 대한 제한도 없애는 한편 학생선발, 교과과정 편성, 도서선정 등에 대한 자율성도 확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전경련은 또 교원인사에도 경쟁체제가 도입될 수 있도록 교장 초빙제를 전면적으로 확대 시행하고 국공립학교 교사 순환보직제도를 개선해 교사들이 10년 이상 같은 학교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하고 교사평가제도도 다양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병기기자 ey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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