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책속에 나를 채우자…‘내가 쓰는 나의 책’ 출간

  • 입력 2004년 3월 2일 18시 53분


1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 모인 학습생활연구회 회원들. 이들은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일상의 학습과정을 추적해 학습이 총체적 삶 속에 축적되는 것임을 추적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박주일기자
1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 모인 학습생활연구회 회원들. 이들은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일상의 학습과정을 추적해 학습이 총체적 삶 속에 축적되는 것임을 추적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박주일기자
텅 빈 책. 최근 출간된 ‘내가 쓰는 나의 책’(박영률출판사)은 지면 152쪽 대부분이 메모지처럼 비어 있다.

책의 각 쪽에는 질문이 한 가지씩 주어져 있다. ‘기분 좋을 때나 허전할 때 나는 왜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가’, ‘고등학교 졸업식, 그날 나는 무엇을 졸업했을까’, ‘난 참 사랑에 서툴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드는 날이었다. 그날은…’ ‘내가 읽고 또 읽은 책은?’….

질문에 대한 답은 독자가 빈 지면에 채워 나가야 한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114가지 질문에 하나하나 답해 나가다 보면 어느새 한 편의 자서전이 완성된다. 누굴까, 이처럼 여백을 책으로 낸 사람은.

‘저자들’은 서울대 사범대 대학원에서 평생교육을 전공한 연구자들의 모임인 ‘학습생활연구회’ 회원들. 서울대 교육학과 김신일 교수를 좌장으로 82∼97학번 대학 강사, 교육연구기관 연구원, 석박사 과정 학생 등 20여명으로 구성된 이들은 2001년부터 ‘학습을 학교로부터 자유롭게 하라’는 모토 아래 공동연구를 진행해 오고 있다.

1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그들을 만났다. 리더인 김 교수는 “제도교육 중심의 ‘학교신화’에 묻혀버린 일상의 학습을 복원하고 있다”고 연구회 취지를 설명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학습과 일상생활, 공직자로서의 삶은 일치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100년간 ‘학습’은 ‘금방 써먹을 수 있는 지식을 익히는 것’을 뜻하게 됐고, 배움의 시공간 역시 ‘학교라는 제도교육 안에서만 이뤄지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설명이다.

이 연구회는 전통적 ‘학습’ 개념 복원의 첫 작업으로 생활 속에서 지식을 터득하는 전통장인을 인터뷰해 평생학습의 궤적을 추적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장인들은 저희와의 인터뷰에서 자기를 새롭게 발견한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스스로 삶의 지혜와 깨달음을 깨친 순간을 저희가 재구성하도록 도와드렸다는 거죠.”

회원인 이지혜 박사(한국교육개발원 평생교육센터)는 이런 경험이 ‘내가 쓰는…’의 발간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내가 쓰는…’은 전문 학술용어로는 ‘학습 생애사 인터뷰’에 해당한다. 장인들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예사로운 질문에도 당황하는 예가 많은 것을 보고는 누구나 쉽게 자신의 학습경험을 되돌아볼 수 있도록 이 책을 내게 됐다는 것이다.

학습생활연구회는 현재 1960년대생 여성 10여명과의 인터뷰를 통해 ‘아줌마 세대’의 일상학습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도 추적하고 있다.

“예상 밖으로 한국 아줌마들의 지적인 호기심이 폭넓고 다양해요. 그런데 자녀학습 때문에 이를 희생하고 있는 거죠. 자녀들의 학교공부 뒷바라지가 엄마들의 일상적 학습욕구까지 억누른다는 점에서 아줌마들 역시 ‘학교신화’의 희생자죠.”(이 박사)

스웨덴에서는 10∼15명의 일반인이 모여 특정주제를 연구하는 공부 동아리를 결성하면 정부에서 학습지원금을 준다. 일본에서는 80대 할머니들이 1년 뒤 프랑스 파리 여행을 위해 프랑스어 공부를 시작한 사례도 있다.

김 교수는 “평균수명 연장, 주5일제 도입으로 한국에서도 학습에 대한 개념 전환이 이뤄질 것”이라며 “학습은 실용적 수단이 아니라 삶의 총체적 지혜를 넓히는 평생의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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