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과 학부모는 정부의 ‘2·17 사교육비 경감 대책’에 따라 수행평가 비중이 늘어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본보 특별취재팀이 최근 서울시내 고교 학교운영위원 1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82명이 수행평가 비중을 확대하는 데 반대했다.
▽평가기준 불신=수행평가는 학습 결과만이 아니라 평소 수업 태도나 과제물 등 학습 과정도 평가하자는 취지에서 1999년부터 도입됐다. 시험만 중시하는 풍토를 개선하기 위해서였다.
교육인적자원부는 ‘2·17 사교육비 경감 대책’에서 공교육 정상화를 위해 교사의 평가권을 강화하겠다는 방침을 밝혔고 서울시교육청은 이에 화답해 현재 과목별로 약 15%인 수행평가 비중을 30%로 높이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수행평가 과외 등 부작용에 시달렸던 학생과 학부모는 반발하고 있다. 이들은 ‘평가 기준이 모호해 교사의 주관적 평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들고 있다.
서울 S여고 최모양은 “똑같이 색깔 있는 펜으로 노트를 정리했는데 영어 선생님은 산만하다고 수행평가 점수를 낮게 줬고 국어 선생님은 깔끔하다고 좋은 점수를 주셨다”고 말했다.
학생과 학부모들은 체육 과목에 앞구르기 수행평가를 한다면 어떤 자세를 취하고 몇 분에 몇 회를 굴러야 하는지 등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이 마련돼야 수행평가에 대한 불신이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로선 수행평가 비중 확대가 치맛바람 등 부작용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마저 나오고 있다.
▽사교육 부담=학부모 홍모씨(42·여·서울 서초구 반포본동)는 딸의 음악 수행평가 때문에 큰돈을 써야 했다. 아이가 리코더로 연주하려 했지만 음악 교사가 “시시하다”고 말하자 부랴부랴 수십만원씩 하는 플루트를 사 딸을 음악 학원에 보냈던 것.
학부모 강모씨(47·여·서울 강남구 대치동)는 “학기 초에 교사들이 과목별로 수행평가 내용을 알려주면 동네 학원에 이에 맞춘 강의가 개설된다”면서 “중고교 수행평가에 대비해 예체능 학원에 다니는 초등학생들이 많다”고 말했다.
▽교사들도 불만=교사들은 학생 수가 많고 각종 업무가 만만찮아 수행평가를 제대로 하기 벅차다고 하소연한다.
서울 B고 김모 교사는 “수행평가 취지에 공감하지만 학생과 학부모가 1, 2점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수행평가를 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경남 K고 박모 교사는 “수행평가 평균 점수가 100점 만점에 98, 99점인 과목도 적지 않다”면서 “수행평가가 ‘내신 부풀리기’의 수단으로 악용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수행평가가 도입된 지 5년이 지나도록 학교 현장에서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수행평가를 확대하는 것은 무의미할뿐더러 무책임하다는 교사들의 지적이다.
이에 대해 교육부 김영윤 학교정책과장은 “수행평가의 방법, 횟수, 비율 등은 시도교육청과 학교장이 결정할 문제다”면서 “3월 중 특별팀을 구성해 수행평가의 문제점을 개선할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서울시교육청 이명호 장학사는 “수행평가 비중을 30%로 늘릴 것을 권장하고 있지만 학교마다 여건에 맞게 수행평가를 운영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성공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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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평가가 항상 말썽인 것은 아니다. 학교에서 하기에 따라 수행평가는 훌륭한 교육 수단이 되기도 하고 애물단지가 되기도 한다.
“‘운동짱’ ‘미술짱’이 누군지 서로 다 알고 있어요.”(서울 광남고 3학년 김백주군)
서울 광진구 광장동 광남고 학생과 이 학교 학부모들은 수행평가에 불만이 거의 없다.
광남고는 학년 초에 교과별로 연간 수행평가 계획을 세우고 항목별 채점 기준을 마련한다. 이 계획표는 학교 홈페이지에 게시되기 때문에 학생과 학부모 모두 알 수 있다. 광남고는 과목별로 평가 결과를 전교생에게 공개한다.
음악 과목 기악연주 시험의 경우 학생들에게 충분히 연습할 시간을 준 뒤 교사가 실기 평가를 하기 전에 중간 점검을 하며 제대로 준비하고 있는지를 확인한다. 미술의 경우 지정된 수업 시간에만 그림을 그리고 스케치북을 밖으로 가져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학원 강사 등 다른 사람이 대신 그림을 그려주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이 학교 학부모 박혜련씨는 “학생들이 실제로 공부한 부분만 평가하고 외부 인사가 학생 과제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차단할뿐더러 공정한 기준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수행평가 점수를 믿을 수 있다”고 말했다.
●황당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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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K고 2학년 장모군은 지난 학기 미술시간의 한지상자 만들기 과제를 서울 종로구 인사동 한지공예점에 ‘의뢰’했다. 장군은 “좋은 점수를 받으려고 3만원을 주고 숙제를 맡겼다”면서 “우리 반 친구 절반가량이 미술 숙제를 ‘돈’으로 해결했다”고 털어놓았다.K고 미술 수행평가는 결국 공예전문가들의 작품 평가가 됐다. 학교에서 개최한 수행평가 과제물 전시회에 공예가의 작품이 학생들 이름으로 전시됐다.
안모씨(42·여·서울 성동구 금호동) 집에 알토 리코더가 2대나 있다. 그는 고교생 아들에게 시내 악기점에서 파는 알토 리코더를 사주었다. 안씨는 “‘선생님이 학교 앞 문구점에서 파는 악기가 아니라고 야단을 치더라’는 아이의 말에 귀를 의심했다”고 말했다. 안씨는 아들이 다음 음악시간에도 같은 꾸중을 듣자 수업태도 점수가 깎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학교 앞 문구점에서 리코더를 또 사야 했다.
학부모 최모씨(44·여·서울 영등포구 당산1동)는 고교생 아들의 숙제를 하느라 여념이 없다. 최씨는 “아들이 ‘학원갈 시간도 빠듯하다’고 말하더라”며 “결국 수행평가는 ‘학부모 평가’가 아니냐”고 한숨을 쉬었다.
특별취재팀
홍성철 기자(팀장)
이헌진 이완배 손효림 길진균 조이영 정양환 유재동 전지원 기자(사회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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