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광주/전남]실업고, 기능인 양성 포기할 판

  • 입력 2004년 3월 21일 19시 32분


부산의 실업계 고교 중 명문인 부산진구 전포동 경남공고.

요즘 이 학교의 가장 큰 목표는 취업을 위한 기능인 양성이 아니라 인문계와 마찬가지로 가능한 많은 학생들을 대학에 진학시키는 것이다.

학교소개 홈페이지에 부산에서 가장 많은 9개(전체 16개 학급)의 진학반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높은 진학률을 제일 먼저 홍보하고 있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실제 올해 이 학교 졸업생 580명의 70%인 408명이 대학에 진학했고 34명이 재수를 선택했다. 138명이 취업했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진학하기로 해 사실상 80% 이상의 학생이 진학을 선택한 셈이다.

이 학교 3학년 김모군(18)은 “처음부터 진학을 생각하고 공고에 입학했다”며 “동일계열 전형과 내신우수자 전형 등 실업고 학생들에게 유리한 진학제도가 많아 취업을 하려는 친구들은 별로 없다”고 말했다.

▽실업교육의 현실=부모들이 웬만하면 자녀를 대학에 보내려고 하는 데다 대학의 정원이 늘면서 진학이 쉬워져 실업고에 지원하는 학생 자체가 크게 줄고 있다.

이에 따라 79개 실업고가 있는 경북지역에서는 올해 5000여명이, 66개 실업고가 있는 전남지역에서는 1800여명이 미달했다.

부산지역에서는 실업고 지원자가 격감하고 인문고는 늘어나는 변화에 맞춰 2개 상업계 고교가 내년부터 인문계로 전환한다.

▽산업현장은 구인난=부산 사하구 장림동 자동차부품 제조업체 A사는 생산인력이 필요해 지난해 10월 실업고 졸업생 10명을 실습생으로 뽑았다. 하지만 이 중 7명이 3개월의 실습기간이 끝나고 대학에 간다며 그만뒀다.

대부분 중소 제조업체도 사정은 마찬가지. 일부를 외국인 노동자로 대체했지만 의사소통이 쉽지 않고 생산성이 떨어져 고민이 많다.

생산현장에서는 기능 인력이 부족해 애를 태우지만 정작 실업고 학생들은 대부분 진학을 하고 신입생마저 급감해 학교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학진학의 문제점=올해부터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실업고 학생들을 위한 직업탐구영역이 추가되면서 진학률은 더욱 높아질 전망이다.

그러나 일부 전문대를 제외하고는 실업고 학생들을 위한 별도의 강좌를 마련한 대학은 찾아보기 힘들다. 고교 3년 동안 배운 기능은 대학에 진학해서는 전혀 쓸모가 없어지는 것.

진학한 실업고 졸업생들은 인문계 졸업생들과 똑같이 일반 강의를 들어야 한다. 또 고교에서 배운 전문기능을 계속 발전시켜나갈 장치가 없기 때문에 실업과목 공부는 내신등급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교육부도 실업고 특성화와 대학진학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실업고-대학의 연계교육은 아직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교육계의 목소리=전문가들은 근본적으로 실업교육 정책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단순 기능인 양성 위주의 실업교육에서 벗어나 컴퓨터 자동차 인터넷 등 하이테크 산업의 전문 인력을 배출하는 특성화 실업고를 육성하고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부산자동차고와 서울 선린인터넷고 등이 대표적인 성공사례.

또 대학의 이공계열에 실업고 출신 학생들이 배운 기능을 계속 연마할 수 있는 학과목을 개설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부산시교육청 이선숙 장학관(54)은 “하루빨리 실업고의 특성화와 대학연계교육의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며 “그래야 산업의 근간을 이루는 고급 기능인력을 양성해 국가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부산=석동빈기자 mobidic@donga.com

대구=이권효기자 boriam@donga.com

광주=정승호기자 sh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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