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전엔…]동아일보로 본 4월 둘째주

  • 입력 2004년 4월 4일 18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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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상동광산의 시설. 상동광산은 1949년부터 수출품목으로 본격 개발되기 시작한 우리나라 중석(텅스텐)의 80%를 생산해 온 광산이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1950년대 상동광산의 시설. 상동광산은 1949년부터 수출품목으로 본격 개발되기 시작한 우리나라 중석(텅스텐)의 80%를 생산해 온 광산이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上東 드디어 廢鑛▼

갈 곳 막힌 二萬 勞動者…재빠른 接待婦들 보따리 싸고

외화획득에 절대적 비중을 점(占)하고 있던 중석은 지난 三월三십一일 ‘한미중석협정’ 기간이 만료됨으로써 ‘중석’의 가치는 일시에 땅에 떨어지는 역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국의 각 중석광산은 부득이 ‘폐광’의 운명에 처하게 되었거니와 그중에서도 전국 중석 총생산량의 八○%를 점하고 있는 상동 광산도 드디어 四월一일부터 광문을 폐쇄하고 휴업상태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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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상동광산만 하드라도 종업원이 二천三백명과 그 가족을 합쳐 一만二천명에 달하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이를 에워싸고 가진 방법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각종 영업자와 고용인 하청덕대에 의하여 그날그날을 지내는 자유노동자를 합치면 무려 二만명에 달하고 있다.

휴업을 단행한 지 사흘 만인 四일 현재 이곳 주택은 매매가 전혀 없을뿐더러 한때 경기 좋았던 각종 음식점도 한산하기 짝이 없다. 벌써 눈치 빠른 술집색시들은 보따리를 동여매고 대전 원주 등지로 옮겨갈 채비까지 보이고 있다.

<동아일보 1954년 4월 6일자에서>

▼‘수출효자’중석 폐광충격…상동광산 썰렁▼

지금은 중석(重石·텅스텐)이란 단어조차 생소해졌지만 이는 한때 ‘한국을 먹여 살리던’ 자원이다.

중석은 광복 후 비로소 개발된 신종 수출품목. 1946년엔 국내생산이 376t에 불과했으나 정부의 장려로 49년 생산량이 1405t으로 급증, 주요 수출품이 됐다. 전쟁 중인 52년에는 한미중석협정에 따라 미국이 한국산 중석을 특별 구매키로 함에 따라 수출이 비약적으로 늘었다. 이 해에 정부는 대한중석광업주식회사를 설립해 54년 초까지 2년간 무려 1만5000t의 중석을 미국에 공급했다. 53년 한국의 수출액 3958만달러 가운데 80%가 이른바 ‘중석불(重石弗)’이었다.

그러나 한미중석협정 기한 종료 이후 중석광산을 포함한 한국경제 전반에 찬바람이 분 정황은 위의 기사에 잘 그려져 있다. 상동 광산촌의 타격이 가장 커 혹심한 구조조정의 몸살을 앓아야 했다.

하지만 수출선 다변화 등의 노력으로 상동광산은 얼마 뒤 다시 문을 열었고 80년대까지 연평균 4000여t을 생산해냈다. 변변한 기업이 없던 50, 60년대엔 “대한중석 직원이면 셋째 첩으로라도 딸을 준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중국산 저가 중석의 유입으로 다시 경쟁력을 잃으면서 상동광산은 92년 채굴을 중단했고 94년 ‘공기업 민영화 1호’로 매각됐다. 강원 영월군 상동에 폐가로 남은 300여채의 광산 사택은 이제 희미한 옛 영화의 그림자일 뿐이다.

윤승모기자 ysm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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