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佛시인 보들레르 출생

  • 입력 2004년 4월 8일 18시 48분


‘우리를 조종하는 끄나풀을 쥔 것은 악마인지고….’

그는 악마파다.

낭만주의가 그 절정에서 흘러내릴 즈음, 우리는 보들레르라는 세기말의 퇴폐와 조우한다. 근대(近代)의 추수기에, 그 거두어들일 것 없는 황량한 정신의 밭고랑에서, 그 무덤과도 같은 폐허 속에서 피어나는 ‘악의 꽃’을 본다.

고통의 연금술은 마비된 의식에 깃들인 악(惡)을 불러낸다. “오, 진흙탕 같은 위대함이여! 그 숭고한 비열함이여!”

샤를 보들레르. 그는 저주받은 시인이었다. 피로에 지친 창녀의 젖퉁이에 얼굴을 묻고, ‘말라빠진 오렌지’를 억세게 눌러 짜는 가난한 탕자였다. 허기진 영혼이었다.

‘악의 꽃.’ 1857년 출간된 그의 유일한 시집 한 권은 근대문학과 현대문학을 갈라놓았다. 말라르메 베를렌 랭보 발레리로 이어지는 프랑스 상징주의는 그의 문학적 자장(磁場) 속에서 공명한다.

1920년대 우리 시인들에게도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미당(未堂)은 “보들레르의 시집이 봄볕에 졸고 있다”는 말을 남겼는데, 혹자는 “하릴없는 식민지 지식인은 그의 탐미주의에서 시적 도취(陶醉)를 얻었으되, 치열함에 있어서 도저히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꼬집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62세였고, 후처로 들어온 어머니는 26세였다.

그의 젊은 날은 ‘어리석음과 과오, 죄악과 탐욕’의 모서리를 핥는다. 술과 마약에 절어 내팽개치듯 살았다. ‘치정(癡情)’의 삶에 젖었다. 20대 초반인 1844년 끝내 한정치산자가 되었다.

그는 40세에 이미 심신이 쇠잔한 노인이었다. 성병으로 머리털이 빠져나간 말년은 피폐했다. 20년 애증을 나누었던 여배우 장 뒤발과 결별한 뒤에는 실어증에 시달린다.

그는 “운명적이며 정신적인 형제”라 불렀던 미국의 작가 에드거 앨런 포의 문학은 물론, 삶까지를 ‘사숙(私淑)’했던 것이다.

‘음탕한 판화를 뒤적거리느라 오랜 시간을 낭비하고 시름에 빠져본 적이 있는가. 기쁨은 고통과 섞여있고, 슬픔의 입술은 언제나 목말라 있음을!’

그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악의 꽃’이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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