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같은 연구는 미국 샌디에이고주립대학 언어학과의 최순자 교수(53·사진)가 주도해 왔다. 최 교수는 한국어와 관련된 실험을 위해 지난주에 내한했고 12일에는 서강대에서 자신의 최신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최 교수는 “언어가 우리의 행동과 사고의 틀을 만들었다는 주장은 1930년대 미국의 언어학자인 에드워드 사피어와 벤저민 워프에 의해 처음 제기됐다”고 말했다. 이들은 영어와 달리 과거, 현재, 미래 시제가 없는 미국 원주민 호피의 언어를 연구해 언어에 따라 인간의 사고방식이 결정된다는 언어결정론을 주장했다. 호피 인디언은 어떤 사건을 보고 표현할 때 시제가 아니라 직접 보았는가 안 보았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1960년대 중반 언어를 인간이 보편적으로 타고난 능력의 결과로 보는 견해가 등장했지만, 1990년 이후에는 언어와 사람의 사고방식이 서로 영향을 미친다는 입장이 나왔다. 여기에는 지난 15년간 영어와 한국어에서 의미 구조와 공간 인지방식을 관련지어 연구해온 최 교수의 역할이 컸다. 최 교수는 세계적 유명전문지인 ‘인지 발달(1999)’ ‘인지 심리학(2003)’ 등에 관련 연구를 발표해 왔다.
최 교수는 “영어는 전치사로, 한국어는 동사로 공간 개념을 표현한다”고 밝혔다.
예를 들어 ‘장난감을 상자에 넣다’나 ‘책을 커버에 끼다’에 쓰이는 영어 표현은 모두 ‘put in’이지만, 한국어로는 ‘넣다’와 ‘끼다’로 구별된다. 즉 전치사 ‘in’은 물건끼리의 접촉 정도에 상관없이 그냥 들어가는 상황이면 어디에나 사용되고 한국어의 ‘넣다’와 ‘끼다’는 두 물건의 접촉 정도에 따라 쓰임새가 달라진다.
최 교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생후 9개월에서 14개월의 유아는 한국인이든 미국인이든 넣는 상황(loose-in)과 끼는 상황(tight-in)을 언어의 도움없이 구별할 줄 알았다. “이때는 어떤 언어든 배울 수 있는 유연성을 지닌 시기”라고 최 교수는 말했다. 실제 12개월 전의 유아가 국적에 상관없이 ‘r’와 ‘l’의 발음을 구별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연구보고가 있다.
하지만 생후 30개월이 되자 한국어와 영어를 배움으로써 유아들의 공간 인지 방식에 차이가 생겼다. 특히 미국 유아들이 한국 유아들과 달리 꼭 끼는 장면(tight-in)이든 그냥 넓은 공간에 넣는 장면(loose-in)이든 비슷하게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어 스크린의 왼쪽과 오른쪽에 책을 커버에 끼는 장면과 홈에 나무못을 끼는 장면을 나란히 보여주는 식으로 꼭 끼는 상황을 3쌍 보여줌으로써 유아들을 꼭 끼는 상황에 친숙하게 만든다. 그후 스크린의 왼쪽에 카세트테이프를 끼는 장면, 오른쪽에 책을 상자에 넣는 장면처럼 서로 다른 상황의 장면을 나란히 보여주자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한국 유아들이 대부분 꼭 끼는 상황인 왼쪽으로 눈을 향한 반면, 미국 유아들은 왼쪽과 오른쪽 화면을 비슷하게 쳐다봤다.
놀랍게 어른들의 경우에도 미국인들은 30개월 된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끼는 장면과 넣는 장면을 구별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두 장면 다 영어의 전치사 ‘in’으로 표현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라며 “이는 세상을 구분하는 능력이 언어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고 최 교수는 설명했다.
또 최 교수는 1990년대 중반에 영어와 한국어가 생후 13∼20개월인 유아의 인지 발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연구했다.
한국 아이들과 미국 아이들이 각각 물건을 종류별로 나누는 실험과 도구를 이용해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실험을 한 결과 물건을 나누는 과제는 미국 아이들이, 도구를 이용하는 과제는 한국 아이들이 1, 2개월 더 빨리 성취했다. 그 이유는 미국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명사(물건 이름)를, 한국 아이들이 동사(도구 이용)를 많이 쓰기 때문이다.
세상을 인지하는 능력이 언어에 영향을 받는다는 또 다른 예는 멕시코 남부에서 테네하판이라는 언어를 쓰는 인디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언어에는 오른쪽과 왼쪽이라는 단어가 없고 다만 절대적인 공간개념인 동서남북에 대한 단어만 있다. 이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예를 들어 사과, 배, 오렌지 순의 배열을 보여주고 180도 뒤돌게 한 후에 같은 종류의 과일들을 주고 방금 본대로 놓아보라고 했다. 그러자 이 사람은 동서남북을 기준으로 물건들을 배치했다. 이는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이 자신을 기준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배열하는 방식과 달랐던 것이다.
이충환 동아사이언스기자 cosm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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