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들 거리시설물에 대해선 실용성만 강조할 뿐 주변 건물이나 거리와의 조화 등을 따져보는 시각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게 사실. 자기 집안에선 가구와 찻잔의 디자인 하나하나를 시시콜콜히 따지면서도 대문만 벗어나면 골목길의 쓰레기통에조차 시선을 주지 않았던 게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계원조형예술대의 김명환 교수(전시디자인)는 “거리시설물의 디자인에 조금만 투자해도 황량하고 삭막한 거리를 풍요롭고 우아한 환경으로 바꿀 수 있다”며 “거리시설물에 대한 디자인은 관(官)이 민(民)에게 줄 수 있는 중요한 행정 서비스”라고 말했다.
○서울시민 디자인불만 가로판매대-휴지통-분리대順
울시립대 도시과학연구원은 2002년 12월부터 지난해 10월까지 서울 전역의 거리환경을 직접 살펴본 뒤 시민 편의를 도와야 할 거리시설물이 오히려 △보행을 방해하거나 △현란한 모양과 색깔로 정보를 알아보기 힘들게 하고 △무질서하게 나열돼 미관을 해치고 있다고 평가했다.
구체적으로, 버스정류장은 미관도 문제지만 정보전달 기능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휴지통은 일반용과 분리수거용이 혼재돼 있는 데다 청결하지 않아 거리 이미지를 해치는 대표적인 시설물이 되어 버렸다는 것. 또 가로 판매대에는 불필요한 부착물과 광고물이 많아 보행 흐름을 방해하기 일쑤라고 지적했다.
이 조사에서 서울시민들은 디자인이 가장 불만스러운 거리시설물로 가로 판매대(20%), 휴지통(14%), 인도-차도 분리대(12%), 버스 승차대(12%) 등을 꼽았다.
이 밖에도 우리 거리에선 통나무 무늬의 콘크리트로 만든 벤치나 정자 등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일본의 경우 사인(Sign)학회가 이 ‘가짜’들을 추방하기 위해 대대적인 캠페인을 편 결과,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재료의 특징을 솔직하게 보여주고 그것을 살리는 것이 더 세련된 디자인이라는 점에서 디자이너들이 가장 질색하는 게 바로 이런 ‘가짜 재료’다.
거리시설물에 디자인 개념을 도입해 도시의 표정을 바꾸거나, 아예 이를 그 도시의 문화상품으로 부각시킨 도시들이 있다.
독일의 하노버가 대표적인 경우. 이렇다 할 만한 관광자원과 특산품이 부족했던 하노버는 1990년대 초반 ‘버스정류장 프로젝트’를 통해 버스정류장도 공공장소에 세워지는 예술품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유명 디자이너와 건축가에게 시내 9곳의 버스정류장 디자인을 의뢰해 시의 새로운 명소를 창출해 낸 것. 나아가 버스정류장 안내서와 포스터, 그리고 프로젝트의 디자인 초안부터 완성된 모습까지의 화보 등을 담은 책으로 펴내 판매하고 있다. 별것이 다 장삿거리가 되는 세상이다.
영국 런던은 전통적인 거리 특성에 어울리는 가로시설물을 디자인한 곳으로 유명하다. 1980년대 후반부터 시설물들은 초콜릿 색으로 하고 공중전화 부스나 버스는 이와 대조되게 빨간색으로 통일해 ‘런던’ 하면 떠오르는 독창적인 거리의 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우리도 이제는 각 도시의 특성을 살리는 거리시설물을 만들어 낼 때가 됐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전국 어느 도시를 가나 거리시설물이 대동소이한 마당에 제주도의 현무암, 이천의 도자기처럼 지역 특색을 살린 소재를 활용해 차별화된 거리시설물을 만들 수 없느냐는 얘기다.
○거리 시설물도 디자인대상…문화상품으로 키워야
1월 초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 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린 ‘거리의 가구 디자인전’은 의미 있는 거리시설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 디자이너가 맡아야 할 몫은 과연 무엇이겠느냐는 고민을 담은 우리나라의 첫 전시회였다.
전시장에는 어린이 장난감 ‘레고’에서 착안한 벤치와 야외 테이블, 벽에 작은 창을 내고 변기를 서로 엇갈리게 설치해 ‘소통’을 강조한 공공화장실, 맨홀처럼 길바닥에 투입구를 만든 휴지통 등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이 번득였다.
이 전시회에 디지털시계, 스테인리스스틸 의자 등으로 깔끔하게 연출한 버스정류장을 출품했던 서울시립대 산업디자인학과 김성곤 교수는 “우리나라에는 생소한 개념인 ‘스트리트 퍼니처’도 디자인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시민들과 함께 공감했다. 이젠 실제 거리에서 이를 실행에 옮기는 일만 남았다”고 말했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환경개선 주체 제각각… 통합 디자인시스템 갖춰야
거리시설물들을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서는 거리환경 전체를 통합적으로 보는 디자인 시스템이 절실하다.
서울시의 각종 가로환경 개선사업을 보자. 주체가 그때그때 시나 구로 나뉘다 보니 사업 자체가 산발적으로 이뤄지고 그나마 일회성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지난해 서울시의 ‘가로환경디자인 개선 기본계획안’을 작성한 서울시립대의 조경진 교수(조경학)는 “녹지 가로사업, 역사문화 탐방로사업, 걷고 싶은 거리 만들기 등 다양한 사업이 진행되고 있으나 시행 주체가 서울시 안에서도 주택국, 도시계획국, 조경과, 문화관광과 등으로 다르고 구청별로도 제각각”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보니 도로구획이나 쓰레기통, 가로등의 디자인이 구간마다 달라 통일성이 없는 것은 물론 지역별 특징도 찾기 힘든 것이 당연한 일. 조 교수는 “거리시설물을 총괄적으로 관리하는 부서를 두어 각각의 시설물에 일관성을 부여하고 구청간에도 일정한 흐름을 형성해야 비로소 도시의 표정이 살아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기획 단계부터 디자이너가 ‘개입’해야 ‘제대로 된’ 거리시설물이 나올 수 있다는 점. 정보공학연구소의 김경균 소장은 “외국에서는 유명 디자이너들이 아예 설계 단계부터 참여하거나 위탁회사가 거리시설물 설치 때 유명 디자이너의 작품을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며 “산업디자인계의 거장 필립 스탁이 만든 버스정류장이 파리의 명소가 된 것은 바로 이런 시스템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디자인과 무관한 업체들이 시설물을 발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니 ‘집장수가 지은 집’처럼 볼품 없는 거리시설물이 양산되고 있다는 얘기다.
김 소장은 “디자이너, 도시계획가, 건축가, 그리고 이들의 전문성을 이해할 줄 아는 공무원이 원활하게 연계되고 협조할 때에만 시민들이 좋은 거리시설물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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