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一일부터 비율빈 마니라 시에서 개최된 제二차 아세아올림픽대회는 九일 하오 五시 폐회식을 거행함으로서 연 九일간에 걸쳐 벌어진 각종경기대회는 종막을 내렸다.
그런데 금번 대회에는 아세아에 있는 十八개국에서 一천五백여명 선수들이 참가한 가운데 거행되었는데 불우한 환경 속에서 참가한 우리나라 선수들은 배달민족의 감투정신과 조국의 영예를 위하여 유감없이 잘 싸웠다. 더욱이 역도 권투 육상 그리고 축구 농구 등 여러 종목에서 우승 또는 우수한 성적을 올리고 마니라 상공에 감격의 태극기를 높이 휘날렸던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의 승리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금번 대회에 참석하였던 경험을 기초 삼어 선수들의 기술연마에 향상을 기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부나 국민은 금후에 이 나라 체육인에 대한 인식을 더욱 두텁게 하여야 할 것이다.
<1954년 5월 10일자 동아일보에서>
▼아시아경기 첫 참가 3위▼
우리나라가 처음 참가한 ‘아시아경기대회’가 바로 이 마닐라대회다. 1949년 한국 인도 일본 대만 등 11개국 대표들이 모여 각국의 올림픽위원회(NOC)로 조직되는 아시아경기연맹(AGF)을 창설하고 올림픽이 없는 중간 해에 대회를 개최키로 했다. 1950년 인도 뉴델리에서 첫 대회가 열릴 예정이었으나 각국의 열악한 사정으로 1951년으로 미뤄졌다. 6·25전쟁 중이던 한국은 여기에 참가하지 못했다.
18개국이 참가한 마닐라대회에 한국은 6개 종목 57명의 선수단을 보내 금 8, 은 6, 동메달 5개로 종합순위 3위를 차지했다. 1위는 금 38, 은 36, 동 24개를 얻은 일본, 2위는 필리핀이었다.
요즘 세대에겐 뜬금없는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당시 우리에겐 역도가 관심 종목이었다. 고종구(高宗具·미들급) 김성집(金晟集·라이트헤비급) 선수가 이 대회에서 각각 금메달을 획득하는 등 ‘메달박스’ 역할을 톡톡히 한 것.
역도는 광복 후 우리나라에 첫 올림픽 메달을 선사한 종목이기도 했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당시 28세의 휘문고 체육교사였던 김성집은 추상(그 뒤 폐지) 인상 용상 합계 380kg을 들어올려 동메달을 땄다.
올림픽 첫 메달의 ‘영웅’으로서 태릉선수촌장과 대한체육회 수석부회장을 역임한 김 옹은 “그때는 선수들이 쌀을 가지고 가서 스스로 밥 해먹으며 연습했고 메달 땄다고 나라에서 밥 한번 사주는 일 없었지만 모두 열심히 했다”며 “지금은 비교가 안될 만큼 여건이 좋아졌지만 스포츠맨십은 오히려 퇴색해 가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윤승모기자 ysm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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