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스·걸’들은 대체로 만 십六세 전후의 소녀들로서 ‘근로기준법’에 의하면 이들의 근무시간은 하루 七시간, 一주일 四십二시간을 초과할 수 없고 인가를 얻은 경우에 한하여 하루 二시간 이내의 근무시간을 연장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장시간을 포함한 최고법정시간인 하루 九시간을 초과한 하루 평균 십二시간 이상을 혹사당하고 있다 하며 이들에 대한 임금 역시 차임수입액의 겨우 一부(分) 정도로 一개월간의 임금 총액은 五, 六천환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리고 사용자는 근로자들에 대하여 一주일 평균 一회 이상의 휴일을 주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뻐-스·걸’들은 휴일도 별로 없이 사용자들을 위하여 과중한 노력만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1954년 5월 29일자 동아일보에서>
▼버스料 ‘삥땅’의심 불쾌한 몸수색까지▼
‘뻐-스·걸’은 지금은 눈 씻고 찾아도 볼 수 없는 버스안내양을 뜻한다. 당시는 6·25전쟁으로 서울시내 전차망이 파괴돼 교통인구가 버스로 몰리면서 대중교통수단으로서 버스의 중요성이 급격히 증대되던 때다. 그러나 휴일도 없이 하루 평균 12시간씩 혹사당하는 버스안내양들의 생활이 알려지면서 비난이 쏟아졌다.
한국에서 버스안내양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31년 서울 유람버스가 운행을 시작하면서부터. 각선미를 드러낸 신식 치마를 입은 당시 안내양은 뭇 남성의 선망을 샀다. 그러나 버스 이용인구가 많아지면서 안내양도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고된 생활인으로 자리매김 됐다.
승객을 차안으로 ‘구겨 넣고’ 자신은 아슬아슬하게 매달려가는 버스안내양의 모습을 기억하는 독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뿐 아니다. 안내양들은 버스가 늦게 왔다고 화를 내는 승객들의 욕설을 들어야 했고, ‘삥땅’을 의심하는 회사측으로부터 몸수색을 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출발하라는 신호로 소리 높여 외치던 ‘오라∼이(all right)’가 그들의 트레이드마크.
1980년대 초부터 버스안내양이 퇴장하기 시작했다. 급격한 산업화로 젊은 여성들이 공장으로 몰리면서 안내양을 구하기 어렵게 되자 안내양 없이 운전사 혼자 운행하는 이른바 ‘원맨 버스’가 등장한 것.
이런 버스 운영방식이 확산되면서 버스요금도 선불제로 바뀌었고 버스 뒷문에 자동개폐장치가 설치되면서 오늘날의 버스 모습이 갖춰졌다. 시민들과 애환을 같이 했던 버스안내양은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성동기기자 espr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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