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복을 빕니다]이기백 前한림대 교수

  • 입력 2004년 6월 2일 19시 09분


코멘트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제자들에게는 관대한 면모를 보였던 고 이기백 교수는 실증적 민족사학의 기틀을 확립한 학자로 존경 받아왔다.-동아일보 자료사진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제자들에게는 관대한 면모를 보였던 고 이기백 교수는 실증적 민족사학의 기틀을 확립한 학자로 존경 받아왔다.-동아일보 자료사진
2일 별세한 이기백(李基白) 전 한림대 교수는 학문이나 사생활에서 엄격했던 학자로 유명했다. 제자인 이기동(李基東) 동국대 교수는 고인에 대해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제자들에게는 관대한 분”이라고 말했다. 너무 꼿꼿해서 제자들이 함부로 말을 건넬 수도 없었던 이 ‘스승’은 학술발표회 때마다 참석해서 경청하며 자상한 가르침을 주었다. 작년 9월 ‘한국사시민강좌’ 편집회의에서 “이제 내 명도 얼마 안 남았다”며 “폐간사를 쓰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주변 사람들은 “고인이 팔순을 바라보며 마음이 조금 약해진 것일 뿐”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그의 지병은 이미 악화돼 있었다. 고인은 일주일 전부터 병세가 급격히 나빠졌지만 그 와중에도 직계가족 외에는 문병조차 받지 않는 엄격함을 고수했다.

역사학계에서는 “1967년 ‘한국사신론’이 출간된 뒤부터 ‘이기백’이라는 이름을 제외하고는 한국사학을 거론할 수 없게 됐다”고 말한다.

식민사관과 유물사관을 배격하고 지배 세력의 확대에 의한 집권 세력의 교체를 한국사 전개의 기본틀로 확립한 ‘한국사신론’은 국내뿐 아니라 미국 중국 일본 등 7개국에서 번역 출간되며 ‘한국사’를 대표하는 저서로 자리 잡았다. 학문적으로 엄격했던 고인은 한국사학계의 최신 연구 성과를 수용하며 1976, 1996년 수정증보판을 거듭 내놨다.

고인은 1924년 10월 21일 평북 정주에서 후일 풀무학원(현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을 설립한 농민운동가 이찬갑(李贊甲·1904∼74)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와세다(早稻田)대를 거쳐 서울대 사학과에서 고 이병도(李丙燾) 교수의 지도 하에 한국사를 공부했다.

한국사 분야에서 고인이 특히 관심을 기울인 것은 고대정치사회사와 고대사상사. 고인은 ‘신라정치사회사연구’와 ‘한국고대정치사회사연구’, ‘신라시대의 국가불교와 유교’ 등 이 분야에서 약 20권의 역저를 내놓았다.

고인의 학문적 태도는 관점을 달리하는 후학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지배층 중심으로만 한국사를 바라본다는 민중사학 계열의 비판은 ‘지배층 바로 아래 세력이 다음 시대를 담당한다’는 고인의 학설과 맞서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학자가 공부를 안 하면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다” “어차피 죽을 바에는 공부를 하다가 죽는 게 낫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마지막까지도 ‘한국사학사연구’의 집필을 계속했던 고인은 이 작업을 후학들에게 남기고 떠났다.

고인이 말년에 특히 관심을 기울인 것은 한국사의 대중화 작업. 1987년 9월부터 역사대중지 ‘한국사시민강좌’(일조각)의 책임편집을 맡아 올해 2월까지 34집을 발간했다. 한국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일반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든 이 반년간지는 무크지와 정기간행물의 중간 형태로 전문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유지하며 성공적인 잡지로 자리 잡았다.

이태진(李泰鎭) 서울대 교수, 민현구(閔賢九) 고려대 교수, 정두희(鄭斗熙) 이종욱(李鍾旭) 서강대 교수, 이훈상(李勛相) 동아대 교수 등이 그의 문하에서 학문의 기틀을 닦아 현재 학계 중진으로 한국 사학계를 이끌고 있다.

김형찬기자 khc@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